구한말 한때 충남에 편입돼, 일제는 문의군(郡)을 청주군에 편입
송시열 조상 묘 산재, 삼현려(三賢閭) 세우고 현창사업 직접 나서

천년도시 청주, 다시 만나다
10.문의면 : 천년의 독립 군현, 그 전략적 가치

권혁상 기자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문의는 1888년(고종25)에 청주에 속했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의군으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896년 칙령 36호에 따라 전국 23부(府)를 다시 13도로 개정하면서 4등 군(郡)으로 충청남도에 포함되었다. 결국 10년뒤인 1906년 다시 충북으로 환원됐다. 문의군은 다시 1914년 조선총독부의 군현 통폐합에 따라 청주군에 편입되어 용흥면(龍興面, 문의군 남면)과 양성면(養性面, 문의군 읍내면·북면), 부용면(芙蓉面, 문의군 삼도면), 현도면(賢都面, 문의군 일도면·이도면)으로 나뉘었다. 한 군현을 네 곳의 면으로 쪼개며 이제 그 위용은 영원히 잃고 말았다. 이후 1917년 양성면은 문의면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30년 1월 1일 다시 용흥면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6년 5월에는 청주군이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면서 문의면은 청원군에 속하였다.

▲ 검담서원 터에 남은 보만정과 묘정비

지난해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 과정에서 여러 곡절이 있었다. 그런데 통합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줄곧 하나의 역사를 강조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문의는 엄연한 독립 군현이었다. 가까운 괴산이 청안과 장연을, 제천이 청풍을, 단양이 영춘을 품듯 복수의 군현이 합친 결과였다. 그렇다면 1914년 일제 당국은 왜 군현을 통폐합했을까? 100년 뒤의 통합론자들이 주장하듯 행정의 효율성이었을까. 많은 이들은 일제가 전통성을 지워 저항의식을 없애려 한 것으로 분석한다. 예로부터 군현 단위로 이루어지던 우리의 향촌의식, 하물며 의병조차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의 사람이다, 송시열

조선시대 문의는 여러 명현(名賢)들의 거주지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송인수(宋麟壽, 1499~1547)를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이 사화를 피해 낙향한 곳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의의 인물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이 유명하다. 송시열이 성장한 회덕과 문의는 인접해 있고, 또 한 때나마 문의에 거주했었다. 1660년 5월 <현종개수실록>에 “문의현 우찬성 송시열”로 기록돼 당시 송시열이 문의에 살았음을 반증한다. 또 송준길은 만년에 금호리의 보만정(保晩亭)에 은둔하였다. 이후 후학들이 그곳에 검담서원(黔潭書院)을 세워 오늘에 전한다.

사실 문의지역에서 송시열의 자취는 자주 발견된다. 그의 선조가 이곳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남일면 화당삼거리에서 남이면 척산리로 가는 길에 은진 송씨의 여러 유적이 있다. 이곳은 남일면 화당리와 문의면 남계리, 남이면 문동리가 서로 잇닿은 곳이다. 먼저 남일면 화당리 문오 마을에 들어서면 을사사화(1545) 직후 죽임을 당한 송인수의 수명유허비(受命遺墟碑)가 있다.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곳을 지나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글자를 새긴 비석이 보인다. 바로 삼현려(三賢閭)다. 어진 선비 세 분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그 글자는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운명하기 직전 쓴 글이라 한다.

▲ 남일면 화당리 문오마을 입구 <삼현려비>

삼현(三賢)이란 송시열의 증조부 송귀수(宋龜壽, 1497~1538)와 동생 송인수, 매제인 성제원(成悌元, 1506~1559)을 말한다. 송인수는 인종 즉위 후 윤원형을 탄핵하여 밉보인 후, 1545년 명종 즉위 후 파직되어 청주에 은거하던 중 사약을 받았다. 선조 때 복권되었고 문충(文忠)이라 시호를 받았다. 성제원은 공주 사람으로 송귀수·송인수 형제의 매제이기도 하다. 보은현감으로 부임 중 우리나라 두 번째 서원인 상현서원(象賢書院)을 세웠다.

삼현려는 원래 한양의 반송방(盤松坊) 유점동(鍮店洞)이다. 그런 것을 이곳에 고조인 송세량(宋世良)이 노년을 보내고 그의 아들 송귀수·송인수의 묘와 함께 있어 이름 붙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1578년경 간행된 <삼현주옥(三賢珠玉)>에는 송귀수 대신 정렴(1506~1559)이 들어가 있다. 정렴의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북창(北窓)이다. 명종 즉위에 공으로 위사공신 1등에 오른 정순붕(鄭順鵬)의 아들이다.

위사공신(衛社功臣)은 1545년 8월 명종이 즉위한 직후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일파와 사림을 대거 제거한 을사사화의 주역이다. 당초 보익공신(保翼功臣)이라 하였다가 그해 9월 위사공신으로 바꿔 불렀다. 이때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하여 사림이 집권한 명종 후반기부터 삭훈(削勳)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1577년(선조10) 공신은 삭훈되고 공신들은 벼슬이 강등되었다.

위사공신 1등에 정렴의 아버지 정순붕이 있고, 3등에는 송귀수와 송인수의 사촌 동생인 송기수(宋麒壽, 1507~1581)가 있다. 사촌간 공신과 역적으로 나뉜 순간이었다. 정렴은 아버지의 전횡을 피해 처가인 청주로 낙향하였다. 그의 아들 정지임(鄭之臨)의 묘가 현도면 노산리에 있는 까닭이다. 현도면 하석리에는 정렴과 송인수를 배향한 노봉서원(魯峯書院) 터가 있다. 이 서원은 1610년(광해군2)에 창건하여 1658년(효종9) 사액되었다. 1695년(숙종21) 송시열을 추향하였으나 훼철된 후 다시 세우지 못했다. 지금은 그 터에 1806년(순조6) 세운 묘정비만 남아있다.

송시열이 정렴 대신 자신의 증조부를 내세운 삼현려비에는 두 가지의 속뜻이 있다. 첫째, 직계 조상을 현창하는 일이다. 지역에서 명현으로 이름 난 종증조부 송인수를 비롯하여 증조부 송귀수를 드러내는 일이다. 둘째는 송인수가 을사사화로 죽임을 당한 반면 그의 사촌인 송기수는 공신이 된 모순을 극복하는 길이다. 당시 사촌 간에 공신과 역적으로 나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이다.

순절로 의를 실천한 야은 송시영

▲ 문의면 소이산 봉수 남쪽 기슭의 <송환기 유허비>

삼현려비를 뒤로 하고 송시영(宋時榮, 1588~1637)의 묘가 보인다. 송시영은 누구인가. 병자호란 때 오랑캐의 굴욕을 피해 강화도에서 목숨을 끊은 이다. 여기에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죽음을 회피했던 순간이다. 이 사건은 서인이 권력을 차지한 경신환국 이후 이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며 논란이 된다. 소론의 영수는 바로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한 윤증(尹拯, 1629~1714)이다.

이들 노·소가 나뉜 이유의 하나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처신이 문제시되곤 하였다. 윤선거는 강화가 함락되는 순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복으로 갈아입고 피난하였다. 물론 그는 평생을 자책하며 은둔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사촌형 송시영이 자진하던 순간 누군가는 구차히 모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송시영은 서인, 혹은 노론이 주장한 대의명분을 실천한 인물로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소론을 공격할 수 있는 정치적 빌미이기도 하였다.

남일면 화당리에는 송시영의 충절을 기리는 충현묘(忠顯廟)가 있다. 결국 화당리는 을사사화 이후 송인수라는 명현과 그의 형 송귀수, 그리고 송시영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문의 충절이 깃든 곳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커다랗게 차지한 묘소와 부조묘, 그 속에 조선 후기를 주도한 정신이 있다. 또한 그들에게 문의는 고향이었다.

문의중학교 뒤편 한쪽에 허름한 비석이 있다. 가까이 살펴보면 성담(性潭) 송선생의 유허비란다. 성담 송선생은 송시열의 6세손 송환기(宋煥箕, 1728~1807)다. 생전에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지만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정조 때의 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묘는 옛 취수탑 뒤 소이산 봉수 남쪽 기슭에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