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연기까지 아우른 문의현, 세종시의 뿌리인 셈
삼국·후삼국시대 치열한 전장,1914년 청주군에 흡수

천년도시 청주, 다시 만나다
⑨문의면 : 천년의 독립 군현, 그 전략적 가치

현재 문의는 청주시의 일개 면(面)에 불과하지만, 1914년 이전에는 독립된 군현(郡縣)이었다. 객사인 문산관이 자리잡고 또 문의향교의 존재가 행정적 독립성을 말한다. 그리고 한때나마 문의군이었다. 그리고 문의현은 종5품 현감이 임명돼 종6품이 대부분인 다른 현보다 격이 높은 곳이다. 그러나 원래의 문의현 지역은 20세기에 들어서 크게 축소되었다. 1914년 이후 현도면과 부용면이 분리되었고, 동면 일부가 가덕면에 편입되었다. 또한 1980년 대청댐 담수 이후 상당 지역이 수몰됨은 물론 여러 행정적 제약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오늘날 문의의 역사는 현암사의 전설처럼 옛 터전의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 기록에서나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문의를 대표하는 문산관.

옛 문의현의 경계는 상당히 넓었다. 특히 고려 때까지 연기현(燕岐縣)과 매곡현(昧谷縣)을 아울렀다. 그리고 문의현은 문의,부용(부강), 현도면과 지금의 세종시와 보은 회인, 회남면을 포함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가 공주 일부와 옛 연기군, 그리고 부강면이니, 그 뿌리는 문의이다. 이런 연유로 문의를 품은 청주가 세종 출범에 큰 몫을 한 셈이다.

문의의 첫 기록은 <삼국사기>에 474년 신라가 일모성(一牟城)을 쌓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신라는 470년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아 금강 상류지역에 첫발을 디뎠다. 나아가 474년 금강 본류인 문의지역까지 차지한 것이다. 신라는 문의지역을 차지한 후 지금의 양성산성(壤城山城)을 쌓았다. 그런데 이듬해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왕이 전사하고 부랴부랴 웅진으로 서울을 옮긴다. 이곳 양성산성에서 웅진(공주)은 30여 km에 불과하다. 말을 달리면 한 두 시간, 걸어도 하루면 닿는 거리이다. 이곳에 주둔한 신라군은 백제군과 함께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함께 막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죽어간 이들은 미천리(米川里) 고분군에 묻혔다.

문의현 지역의 산성 밀집도는 우리나라 최고다. 무려 열일곱 곳에 달한다. 이처럼 좁은 지역에 밀집된 것은 거듭된 전쟁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5세기 후반부터, 또 후삼국이 다투던 1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삼국· 후삼국의 운명을 건 전투의 현장이 이곳이다.

▲ 문의향교

백제 일모산군, 신라의 연산군으로

문의지역은 본래 백제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 신라가 차지한 뒤에도 한동안 명칭을 유지하다가 경덕왕 때 연산군(燕山郡)으로 고쳤다. 이 지명은 고려 때까지 이어졌다. 이때 연산군이 관할하던 지역은 지금의 문의지역을 넘어 세종 연기지역과 보은 회인지역을 포함한다. 백제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던 연기현과 백제 미곡현(未谷縣)이었던 매곡현을 포함하였다. 이처럼 문의의 옛 지명인 연산군은 연기현과 매곡현을 거느린 규모 있는 행정 단위였다.

이후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의는 후백제의 영역이었다. 925년 고려 태조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연산진을 쳐서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보낸 글에, ‘연산군 지경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길환을 군중에서 목 베었으며, 이어 청주성(靑州城)을 격파하던 날에는 직심(直心) 등 4, 5명의 목을 베었다’고 자랑하였다. 비록 길환과 직심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였으나, 사실은 문의와 청주가 곧 후백제의 영역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918년 태조가 궁예를 내쫓고 즉위하자, 웅주(熊州) 운주(運州) 등지와 청주의 진선(陳瑄) 등이 후백제로 돌아섰다. 오죽했으면 이때의 상처가 훈요10조에 남아 지역 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제8조에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바깥 사람은 관리로 채용하지 말라”고 명시했다. 바로 지금의 공주와 홍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데 925년 유금필의 싸움 이후에도 문의는 후백제에 속하였다. 932년 친히 일모산성을 정벌하여 격파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문의에 막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던 고려군은 예상치 못한 승기를 잡게 된다. 그해 6월 연산군 관할의 회인 호족 공직(?直)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이다. 원래 공직은 견훤의 부하 장수로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공직이 왕건에게 항복하며 배후를 빼앗긴 후백제에겐 커다란 타격이었다. 결국 932년 고려가 문의를 차지하며 금강 유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후 왕건은 청주와 문의, 그리고 회인마저 차지하며 후백제의 방어선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것이 후삼국시대를 종결하는 통합의 시작이었다.

이렇듯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문의를 어떻게 대했을까.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1172년(명종2) 비로소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독립 군현은 아니었던 듯하다. 곧 1172년 이전까지는 청주목의 속현으로 있다가 이때 비로소 감무가 파견된 독립 군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1259년(고종46) 위사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고향이라 하여 이름을 문의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감무는 고려~조선 초기에 군현에 파견되었던 관리로서 현령보다는 한층 낮은 위계였고, 1413년(태종13) 현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1259년에는 공신의 고향이라 하여 한 단계 높은 현령이 파견되어 위상이 높아졌던 것이다. 위사공신은 최의(崔?)를 죽이고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을 말한다.

▲ 미천리 고분
 
▲ 양성산성 남벽

고려 훈요10조 지역차별 명시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에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하게 하였다가 바로 복구하였다. 종5품 현령이 파견된 문의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문의에는 독립된 군현으로 객사를 포함한 관아는 물론 향교(문묘),사직단,성황단,여단 등 제반 시설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향교는 현의 서쪽 1리에 있다고 하고, 사직단은 현 서쪽, 성황사(城隍祠)는 양성산에, 여단은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 영조 때의 <여지도서>에 향교는 현의 서쪽, 사직단과 성황사, 여단이 모두 양성산 남록에 있다고 하여 여단은 자리를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향교는 여러 번 자리를 바꾸었다. 처음 현의 서쪽 1리에 있던 것을 1609년(광해군1) 폐지되었던 현을 다시 복구하면서 현의 남쪽 3리 기산리(箕山里)로 옮겼다. 그런데 이곳은 땅이 고르지 않아 1683년(숙종9)에 현령 이언유(李彦維)가 현의 서쪽 2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또한 관아 자리는 조선 전기와 후기 기록에 차이를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성산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나, <여지도서>에는 현의 서쪽 2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아가 2리 가까이 서쪽으로 옮겨간 것을 말해준다.

문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황폐화되고 인구가 줄어들자 현을 없앴다가 1609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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