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인부락’ 창간호(1936)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시적화자가 젊어서 죽은 화가로 되어있지요. 다섯 행 모두 ‘말라’ ‘달라’ ‘생각하라’ 같은 명령형 어미로 종결되어 있어 시의 어조가 단호하고 힘이 있습니다. 화자인 ‘나’는 자신의 무덤에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말고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고 합니다. 또한 ‘해바라기의 긴 줄기 사이로 끝없는 푸른 보리밭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뜨거운 생명에의 의지를 강열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나의 사랑’이며,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는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말합니다. ‘해바라기’와 ‘보리밭’ 같은 소재를 통해 정열적인 삶을 향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는 시인데요, 아무래도 젊어서 죽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까마귀 나는 밀밭’의 강열한 이미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 꿈틀거리는 열정을 그림으로 그려낸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미술 경매시장에서 언제나 고가를 자랑하는 고흐의 그림들. 치유할 수 없는 정신질환에 시달려야 했고, 끝내 권총으로 자살을 선택했을 만큼 고독했던, 살아생전에는 단 한 점만의 그림이 팔렸을 뿐인 비운의 화가. 그림이야말로 생의 유일한 안식이었을 고흐는 그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을 몇 점 남겼지요. 날카롭게 꿈틀거리는 붉고 노란 꽃잎, 고랑이 패일 듯 힘차고 거친 붓질, 해바라기의 이미지 역시 불안정한 흥분 상태의 초조함이 담긴 자신의 마음을 그려낸 것이지요.

지난 5월, 필자는 고흐가 소위 그 ‘눈부시게 확연한 빛’을 찾아 머무르며 마지막 생의 정열을 바쳐 그림을 그렸던 남프랑스의 ‘아를’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요, ‘아를 시절’ 그가 자주 들러 차를 마시던 카페를 찾아 갔지요. 눈을 쏘는 빛 부신 햇빛 속에 앉아 37 살로 불타는 생을 마친 고흐를 생각하며 그가 즐겨 마셨다는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가슴을 덥힌 적이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와 같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으로,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순수 인간주의, 절실한 생명의 구경을 시로 표현하던 함형수 시인도, 고흐처럼 정신분열증을 앓았으며, 1946년 32살에 요절합니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으면서 못다 한 꿈과 사랑을 노래한 이 시의 화자는 화가로 되어있지만, 이는 곧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인 자신이기도 한 것이어서 더욱 안타깝게 읽히는 시입니다.

여름이 태양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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