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사회읽기/ Artist 2창수

▲ 심사정, 딱따구리, 비단에 채색, 25x18, 18세기.

심사정은 양반이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의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이고 조부는 심익창(沈益昌)이다. 그의 아버지 심정주(沈廷胄)와 외할아버지 정유승(鄭維升)은 포도를 잘 그렸다. 그러나 심사정이 그림을 그릴 수 밖 에 없었던 일은 조부 심익창의 과거시험 부정과 영조시해 가담으로 역적집안이 되어 출세 길이 막히게 되어 평생 그림을 그리는 일 말고는 딱히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 과욕이 19세의 심사정을 청년 실업자로 만든 것이다.

심사정은 8~9세때 종로구에서 같은 동네 화가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정치적 욕구가 과도한 분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서인들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노론의 주요 가문을 멸문에 이르게 하기도 하였다. 이때 겸재의 스승인 김창흡 집안을 무너트린 전력도 있어서 심사정은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계속 배워도 뜻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할아버지의 오지랖으로 가는 곳 마다 돌을 치워야 했다. 겸재는 진경산수(眞景山水, 중국그림의 모방이 아닌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산수화 방법)의 방법을 통해 중국의 화풍을 극복하려 하였으나 그러한 겸재의 화풍을 이어도 심사정의 미래는 돌만 치워야 했다. 그럼에도 심사정에게 기회가 왔다. 외가 6촌 예조판서 이주진의 추천으로 화원들의 어진 제작(임금 초상)을 감독하는 감동(監董)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채 1달도되기 전에 ‘심익창의 손자가 어진제작에 참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받게되고 심사정은 바로 파직이 되었다. 그간 변변한 직업도 없이 첫 직장을 갖게 되었는데 42에 또 실업자가 되었다.

실직을 하고 초야에 묻혀 산 심사정이 말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의 제목은 ‘딱따구리’이다. 조선시대 화조화의 명작으로 취급되는 이 그림은 나무에 불편하게 붙어있는 새를 그린 것으로 어떠한 행동을 하는 새가 아닌 그냥 나무에 붙어서 감상자를 바라보는 새이다. 서대문 밖의 반송지 초가에서 기거하던 심사정은 모든 욕심을 초월한 듯 이렇게 그림을 그리며 살았지만 그럼에도 어떠한 미련 때문인지 한양근처에서 살았다. 어쩌면 소나무에 위태롭게 붙을 수 있는 능력은 포기 못 했나 보다.

정치인들은 위기돌파를 위해 돌아가신 전직 대통령을 이용하며 국민을 현혹시킨다. 속는 것이 바보지만, 국민취향을 고려한 맞춤식 전략으로 경상도는 경상도대로 전라도는 전라도대로 국민은 또 속고 또 믿는다. 심사정의 작품은 과거 정서에 붙어있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불편한 것인지를 자신의 삶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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