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주형민 청주노동인권센터 노무사

▲ 주형민 청주노동인권센터 노무사

퇴직 후 임금 체불 상담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이 꽤 많다. 이 분들의 사연을 들어 보면 돈이 전부가 아니다. 재직 중 회사의 관리자와 동료, 원청 직원 등에게 받은 수치심, 모멸감 등이 뇌관으로 작용한다. 회사에 다닐 때는 꾹꾹 참았지만, 퇴직 후에는 ‘자유롭게’ 가해자를 응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 대부분이기에 재직 중에는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임금 체불뿐 아니라 징계, 산재 등의 상담에서도 공통적으로 노동자들은 심리적인 ‘모멸감’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 막상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사용자가 징계 처분 등의 실제적인 불이익을 가하지 않는 한, 노동자가 느낀 ‘모멸감’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한 것이다.

사용자나 고객한테 모멸감을 느낀 노동자는 지속적인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울증으로 이어져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멸감’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편차가 있는 것 같다. 상담을 하다 보면, 내 느낌이지만, 주로 착하고 성실한 노동자들에게 회사 관리자 등이 함부로 대하는 사례가 많았고, 이들이 느낀 모멸감은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모멸감은 이미 개인이 감당해야 할 수준을 넘어선 듯하다. 최근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른 사건도 여럿이다. 아파트 경비원 노동자가 동네 주민한테 받은 모멸감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고, 항공사 임원이 승무원들에게 모멸감을 준 ‘땅콩회항’ 사건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최근 감정 노동자 문제가 떠오르면서 법과 제도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또한 일부 기업에서도 자체적인 지침을 제정하여 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 이마트는 지난해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감정노동 직원의 스트레스를 예방하기 위한 ‘이-케어(E-Care)’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고객 응대담당 직원에 대한 내부·외부전문가 상담을 진행하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한다는 것. 직원 보호를 위해 폭언과 욕설 등을 하는 고객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 전 지점에 배포하고 점포 관리자급에서 선제적으로 대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 고스트레스 직무 수행 직원을 대상으로 감정조절을 위한 훈련 및 역할극 등의 워크숍을 진행한다. 아울러 교환, 환불 등 고객응대 시 행동요령 개선을 위해 ‘소비자 전문상담사 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점포 내 고객응대가 우수한 사원을 대상으로 소비자 전문상담사 자격증 취득을 지원한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하지만 지난해 안양시가 추진한 관내 대형마트 감정노동자에 대한 정신건강검진사업이 좌초된 것은 유감스럽다. 안양시보건소는 지난해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유통 사업장 9곳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종사자에 대한 정신건강검진사업을 추진했다. 관내 대형마트를 대상으로 유통업체 종사자 스트레스 진단관리 동의협조 요청 문서를 발송했지만 참여의사를 표시한 업체는 2곳에 불과했다는 것. 그나마 참여 의사를 밝힌 2곳의 업체 역시 보건소가 진행하는 실태조사에는 협조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들 업체들은 해당 감정노동자에 대한 교육과 상담 등은 자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마 이마트도 여기에 포함됐을 것이다. 결국 제도적인 접근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 현실이다.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에서 저자인 김찬호 교수는, ‘모욕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인권 감수성이라는 말이 익숙해졌듯이 모욕 전반에 대한 감수성을 사회적으로 끌어올리자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역지사지로는 부족하고, 역지감지(易地感之),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느끼는 단계까지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아직까지 대세를 이루는 ‘힐링’보다는 훨씬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더욱 공감 가는 내용은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신뢰의 공동체’는 노동조합이 될 수도 있고, 시민사회단체가 될 수도 있고, 등산회 등의 친목 모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 김찬호 교수의 말처럼 ‘안전한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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