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 1939. 8)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모순과 분노의 시대일수록 역사는 선구자를 불러내어 격랑의 시대를 극복해 나갑니다. 일제 말, 치욕의 친일문학이 지배하던 암흑의 시대에도 민족의 참된 영혼을 지키려는 고통에 찬 저항의 문학은 뜨거운 불길로 타올랐으니, 그 중심에 ‘청포도’, ‘절정’, ‘광야’의 시인 이육사가 있지요.

혹자는 변절과 순응을 택하여 안주했고, 혹자는 붓을 꺾고 탄압의 시대를 간과했으며, 혹자는 낙향하여 술로 울분을 달랬고, 혹자는 밝은 날을 기다리며 혈서처럼 글을 써서 서랍 속에 쌓아두고 있을 때, 하늘을 찌르는 용기를 가지고 항일 전선에 직접 뛰어들어 옥사의 순국을 선택한 불굴의 지사가 바로 육사 선생입니다. 당시 춘원은 ‘이(李광(狂)수(洙)’로 매도당했고, 육당은 만해선생의 ‘조문(弔問)’을 받고 얼굴을 못 들던 처지이고, 이효석은 총독부 검열관으로 취직했으나 주위의 야유와 비난 때문에 급기야 사직하고 함경도로 떠났고, 염상섭은 일찍이 붓을 꺾고 만주로 피신해 있었고, 이병기와 이희승 등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김광섭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8개월 복역 중이었으며, 영랑과 젊은 김동리, 청록파들은 낙향해서 독서와 습작에 열중하는 등, 그 침묵과 절필의 침통한 상황에서 육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저항의 화신이 되지요.

1904년 유가의 기골이 뿌리 깊은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 손으로 태어난 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으로 보문의숙과 교남학교에서 수학한 후, 22살에 대구에서 두 형님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합니다. 어려서부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배운 고집 센 육사는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인 27년에 귀국하여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받았는데, 그때 수인번호 64(혹은 264)를 평생 호로 삼게 되지요. 29년 북경대 사회학과에 다니면서 노신을 만나고 중국문학을 소개하기도 하면서, 약 10여 년 동안 동인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대륙적 기상과 민족의 절규가 담긴 30여 편의 시를 남기게 됩니다. 1943년 중국을 잠시 다녀온 후 명륜동 자택에서 일경에 채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고, 44년 음력 1월, 몽매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6개월 남기고 이역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

40년 남짓,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그는 한결같은 초인의 의지로 일제에 저항한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거지요. 그가 왜경에 의해 감옥에 간 것만 17번이며, 수없이 중국 대륙을 넘나들며 오로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그야말로 형극의 고초를 당하면서, 전 생애를 걸고 ‘청포를 입고 찾아올 손님(청포도)’과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기다렸습니다.

‘청포도’는 육사의 시 중에서 문학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오랜 세월 국민 애송시로 사랑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자오선’ 동인답게 신선하고 눈부신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억압된 시대의 장벽을 넘어 그가 꿈꾸고 소망하는 세상을 향한 간절한 신념을 잔잔한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지요.

미루나무가 선 풍경 넘어 잘 익은 보리밭이 넘실대는 7월은 청포도의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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