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청주로’ 권태호 변호사 “고향에 진 빚, 헌신 보답하겠다”
지방대 출신 검사장 정치적 ‘희생양’돼 고검검사로 ‘와신상담’ 8년

▲ 사진=육성준 기자

36년간 최장수 현직 검사 생활을 마감하고 지난 4월 청주 법무법인 ‘청주로’에 몸담은 권태호 대표변호사(60). 청주고·청주대(77년)를 졸업한 그는 2004년 역대 지방대 출신 검사 가운데 4번째로 검사장에 임명됐다. 3번째 이후 19년만이니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셈이다. 하지만 3년만에 고검검사로 전보됐다. 한직으로 알려진 고검 검사로 신분이 바뀌어 8년을 와신상담했다. 처음엔 하루 3천배씩 3일간 1만배 절을 올리며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청주에서는 지역 원로부터 학교 동문회까지 나서 시민 2만명의 탄원 서명부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이 2번 바뀌고도 명예회복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권 변호사는 지난 3월 명예퇴직과 함께 고향인 청주에서 내년 총선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공직 경험을 고향을 위해 쓰겠다는 각오다. 영호남 권력구도 속에 ‘희생양’이 됐던 충청도 검사가 이제 정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와신상담’의 고초를 겪은 대한민국 최장수 검사를 만나 그간의 심정과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봤다.

▲ 지난 3월 퇴임을 맞아 황교안 법무부장관(현 총리)과 인사를 나눴다.

-36년간 검사 재직으로 “박 대통령때 시작해 박 대통령때 끝냈다”고 비유되기도 한다. 오랜 공직을 떠난 소회는?

“검찰 간부로서 무거운 짐을 벗고 평범한 시민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홀가분함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출발 때 각오만큼 하고자 했던 일을 완수하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나에 대한 고검검사 전보인사가 잘못됐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자진 사퇴’를 거부했다. 명예회복을 위해 원칙을 고수하며 근무하다보니 36년 재직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갖게 됐다. 30년 이상 장기근속자가 몇명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시 최고참 기수로 검찰에 재직하면서 김학의 법무차관 사퇴, 한상대·채동욱 총장 사퇴,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사건 수사 검란 등 검찰조직의 위기상황을 목도했다. 그때마다 검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조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내용이었나?

“검찰의 일원으로서 또 간부로서 여러 의견을 제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일반론적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검찰 본연의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자는 의견을 표명했다. 권력이나 정권의 눈치보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국민의 검찰’이 되자고 고언했다.(지역 법조계 전언에 따르면 일부 내부통신망 글은 수위(?)가 높아 검찰 고위층의 삭제요청을 받기도 했다는 것)”

-검찰 재직시 가장 기억에 남는 수사 사건은?

“1988년 ‘5공화국 비리수사’의 단초가 됐던 ‘노량진수산시장 공금횡령 사건’의 주임검사로 일했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이 사건의 몸통이었던 전직 대통령 큰형(전기환씨)을 끈질긴 수사끝에 자백받아 구속기소하는 성과를 거뒀다”

-김흥주 회장 금융계 로비사건에 연루돼 탄탄대로가 고날의 길로 바뀌게 됐는데, 김 회장과는 어떤 관계로 알게 됐는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와 김 회장의 금융계 로비사건은 아무 관련이 없다. 김 회장과는 사회 선배라는 인연으로 10여년 정도 사적 친목모임을 통해 만났다.(언론에 보도된 고교 선후배 관계는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언론에서 내용을 부풀린 과장 보도로 요란했지만 결국 나온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시 검찰 간부로서(안산지청장)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공정하게 업무처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 일부 사람들(당시 대검 박주원 수사관)이 이 사건과 연관시켜 곤경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또 당국마저도 이들의 주장에 편승해 나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만약 김 회장의 로비에 개입됐다면 사건 이후 7~8년을 더 검찰에서 근무하고 명예퇴직할 수 있었겠는가? 조직의 희생양이 돼 개인인 나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스트레스를 겪게 된 것이다”

-박주원 수사관은 1억원 금품수수 혐의에도 불구 6개월만에 대검으로 재발령났다. 하지만 검사장급인 권변호사는 내사 사실확인 전화 한통화로 강등인사 당했다. 당시 이런 불공정한 인사처리가 가능한 배경은?

“정권 담당자 측에서 비리있는 검찰 간부를 찾겠다는 미명하에 지방대 출신인 나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내가 자진사퇴를 거부하자 부당인사로 압박한 것인데, 결국 정권 담당자도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한 수사관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이용만 당한 셈이다”

-당시 언론보도에 불만을 제기했는데 “일부 언론에서 마치 검사장 출신과 말단 수사관의 대결인 것처럼 보도되고 비교되는 것이 참으로 불편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언론청문회도 제안했었는데 배경과 결과는?

“사실은 정권 담당자 측과 대립한 것이지 일개 수사관과 대결구도는 아니었다. 당시 당국과 맞선 상황에서 일부 언론이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상황이었다. 객관적으로 진실규명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내가 언론청문회를 자청한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실제 청문회는 이뤄지지 못했다”

-소청심사가 기각되고 인사 취소소송도 패소했는데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법원은 나에 대한 고검 검사 발령이 강등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직급제가 폐지 됐기 때문에 단순 전보라는 것이다. 언론에선 다들 강등인사라고 제목을 뽑았는데 재판부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 반면에 고검 검사에서 검사장으로 전보되고 지검장에서 고검장으로 전보되면 다들 승진이라고 하지 않나? 결국 ‘이현령비현령’의 이율배반인데, 이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정치 입문의 동기, 정치인의 조건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장점과 단점은?

“부족한 사람이 고위 공직자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가족, 선후배 그리고 지역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그분들에게 보답하고 싶고 지역봉사(정치포함)를 통해 지역 발전에 헌신해 보고자 결심했다. 장점이라면 통합 조정능력과 상생을 지향하는 긍정적 마인드가 아닐까 싶다. 오랜 공직생활의 중앙 인맥과 전국 각 도시에서 근무하면서 우수한 발전사례를 직접 확인한 점이다. 단점이라면 지역에 터 잡고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펼친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가능한 인연을 맺은 공사적 모임 등에 열심히 참석했고 한시도 고향 청주를 잊지 않고 발전 방안을 고민해 왔다”

-현재 가족 관계와 성장 과정을 소개한다면.

“청주시 북이면 금대에서 2남3녀의 첫째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서울 소재 대학입학을 포기하고 청주대의 장학금 지원으로 고시공부를 해 졸업하던 해 최종 합격했다. 서울 생활을 마다하고 고향을 지키고 계신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는 큰 여동생 내외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현직 검사의 과중한 업무로 챙기지 못한 자식 셋(2남 1년)을 건강하게 키워낸 아내도 참 고마운 사람이다. 현재 다들 성장해 교사, 의사,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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