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사건 박해받던 순천 박씨, 세종에서 청주로 이동
청석학원 설립자 청암·석정 형제 부모산·와우산 묘 조성

권혁상 기자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송상현의 묘 앞에는 임진왜란의 참화를 같이 겪은 두 첩의 묘와 단(壇)이 마련되어 있다.

지난 호에서는 부모산의 산성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부모산을 터전으로 삼은 유력 성씨들의 자취를 살펴보기로 한다. 부모산 정상에 오르면 방송통신 송출탑이 있고 그 정상은 철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다. 이곳에 청주대학교와 청석학원을 설립한 석정(錫定) 김영근(金永根, 1888~1976)의 묘소가 있다. 여름철엔 수목이 우거져 볼 수 없지만 동쪽 와우산(우암산)에 있는 형 청암 김원근(金元根, 1886~1965)의 묘소와 마주보는 위치이다. 해방직후 사재를 털어 첫 지방 사학을 세운 두 형제가 청주를 대표하는 동서 두 산에서 서로 마주보고 자리한 셈이다.

김영근의 묘소 아래에는 배위인 경주이씨의 묘소가 있다. 상석에 쓰인 ‘사자(嗣子)’라는 표현을 두고 현장을 답사한 이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사(嗣)는 ‘잇다, 상속하다’ 라는 뜻인데, 백부에게 양자로 가 종계를 이은 인물이 남긴 여지를 엿불 수 있다. 아무튼 와우산·부모산의 상당 부분이 지금도 청석학원의 소유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육영사업의 기초가 된 축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역 명문가로 자리 잡은 순천 박씨

백제와 신라가 서로 주인을 바꾼 부모산성은 오늘도 끊임없는 갈등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상이 남겨준 터전(땅)은 오늘날 엄청난 재산가치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제 부모산 기슭에 터를 잡은 유력 성씨들의 집안내력을 살펴보자. 청주를 본관으로 하진 않지만 일찍부터 청주에 세거한 성씨 중의 하나는 순천 박씨다. 고려 초의 공신인 박영규(朴英規)를 시조로 한다.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지만 왕건을 도와 개국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실제 순천 박씨의 시조와 청주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순천 박씨는 인근의 대전·세종시에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사육신 사건으로 크게 타격을 입은 그들이 청주 경계에 들어온 것은 9세 박의륜(朴宜倫) 때라 한다. 순천 박씨는 조선 초부터 훈구로 크게 득세한 성씨로 일찍부터 청주지역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중시조 박숙정(朴淑貞)의 손녀가 청주 오창에 자리 잡은 김사렴(金士廉, 1335~1405)의 아들 김약과 혼인한 것도 관련 있다. 오창에 세거하는 (구)안동 김씨는 전의 이씨, 청풍 김씨를 비롯해 오늘날 우리 지역의 여러 성씨가 입향한 터전이었다.

그밖에 2세 박원상(朴元象)의 묘가 대전 동구에, 그의 아들 박안생(朴安生)의 묘가 세종 전동면에 있다. 박안생의 아들 박중림(朴仲林)과 그의 아들 형제들은 우리가 아는 사육신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렇지만 선대 묘소의 분포는 우리 지역 가까이에 일찍부터 순천 박씨의 터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천 박씨가 지역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것은 전란의 순간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춘무(朴春茂, 1544~1611)와 박춘번(朴春蕃) 형제는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그후 순천 박씨가 다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1728년(영조4) 무신란(戊申亂) 때 박춘번의 현손 박민웅(朴敏雄)과 박민준(朴敏俊) 형제 등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이렇듯 국난의 때에 맞춰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면서 순천 박씨는 지역의 유력한 성씨로 자리 잡았다. 2001년 후손들은 민충사(愍忠祠)를 세워 임진왜란 등 3대 창의(倡義)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 팔봉산 북쪽 자락에 있는 박춘무의 묘.

송상현, 전란속 부인 외가인 청주에 안장

부모산 서쪽은 여산 송씨가 모여 산다. 마침 임진왜란의 순절 충신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의 묘소와 신도비, 그리고 그의 부조묘인 충렬묘, 마을 입구에는 충신 정려가 있다. 여산 송씨와 청주의 인연은 우리에게 '양아록(養兒錄)'의 저자인 이문건(李文楗, 1462~1501)과 관련 있다. 그는 아들 이온(李溫)의 배필로 당시 오창에 살던 김해 김씨를 맞았는데, 그의 딸이 송상현에게 시집갔다. 송상현의 부인 성주 이씨는 이문건의 손녀였다. 성주 이씨에게 청주는 곧 외가인 셈이다. 먼저 이문건은 괴산의 유력 성씨인 (구)안동김씨에게 장가들어 그 후손들이 괴산에 세거한 배경이 되었다. 얼마 전 고령에 있던 이문건의 묘도 괴산으로 옮겨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591년(선조24) 동래부사에 부임한다. 이미 전란이 일어날 것이란 흉언이 돌던 터라 그의 동래부사 부임 소식은 집안을 초상집으로 만들었다. 마침 이듬해 4월 왜군이 부산진을 거쳐 동래에 들이닥쳐 성이 함락될 즈음 송상현은 처연히 죽음을 맞이했다. 같은 때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이 바다에서 지난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문무(文武)의 차이였던가. 지금도 여러 장의 기록화로 남아있는 동래부순절도는 하루 싸움의 긴박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때 두 여인이 보이는데, 멀리 함흥에서 데려온 첩 한금섬(韓金蟾)과 서울서 데려온 이양녀(李良女) 등 두 명의 첩이다. 금섬은 당시 함께 순절하였고 이씨는 왜에 끌려갔다 절개를 지키고 돌아왔다. 지금도 송상현의 묘 앞에는 두 첩의 묘와 단(壇)이 마련되어 있다.

사실 송상현은 개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여 청주와 직접적인 인연은 없다. 다만 성주 이씨 부인의 외가가 이곳이라 산소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전란 중에는 동래성 바깥에 임시로 묻었다가 1595년 아들 송인급(宋仁及)이 조정에 아뢰어 왜군의 협조를 받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성주 이씨는 임진왜란 직전 거듭된 시조모와 시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남편의 운구마저 자신의 외가 터전으로 옮겨오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지금 성주 이씨의 묘는 남편과 떨어져 보다 서쪽에 있다. 송상현의 묘와 두 첩의 묘·단, 그리고 성주이씨의 묘는 당시 순절이라는 가치 속에서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 충렬묘

송상현의 순절로 명 원병 동원

송상현의 순절은 명나라의 원군을 독려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처음 왜란이 발발하자 명 조정은 조선을 의심했다. 왜를 끌어들여 명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했다. 왕 조차도 송상현의 순절뿐만 아니라 수령들이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송상현과 부산진 첨사 정발의 순절 사실을 거듭 상주하여 명의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송상현의 자세한 순절은 1594년 12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왜장에게서 그의 장렬한 순절 사실을 듣고 조정에 보고한 이후 알려졌다. 곧 이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이듬해 왜적의 수중에 있던 동래에서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겨오란 특지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때 정려를 세우란 명이 있었고, 1655년(효종6) 충렬이란 시호를, 1681년(숙종7) 의정부 좌찬성으로 벼슬을 더 높였다. 이후 자손들에게 벼슬이 내려지고 1766년(영조42) 부조묘인 충렬묘를 세웠다.

지금의 수의동 강촌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세 칸의 정려가 있고, 좌우에 후손들의 열녀각이 더불어 있다. 마을 뒤로는 옛 충렬묘와 최근 다시 세운 충렬사, 천곡기념관이 있다. 지역을 달리하여 사당을 세운 경우는 많아도 한 곳에 두 위패를 모신 사당은 처음이 아닌가 한다. 묘소와 신도비는 동쪽으로 산 너머에 있다.

이곳 법정동명인 수의동(守儀洞)은 보다 남쪽의 숫절에서 유래한다. 그렇지만 여산 송씨 후손들은 송상현의 순절에서 찾으려 하고 마을 이름도 강상촌(綱常村)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 부모산 서쪽 자락은 성주 이씨의 외가라는 인연과 묘소와 부조묘를 위한 사패지(賜牌地)로 여산 송씨의 4백년 터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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