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낙 타
-이한직-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 옛날에 옛날에 -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윈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

(‘문장(文章)’ 1939)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따뜻한 봄날 오후 동물원 잔디 위에서 잔잔한 회상에 잠겨봅니다. 눈을 감으면 문득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오십니다. 꾸부정하니 회초리를 들고 있는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지요.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서있는 낙타는 영락없는 선생님의 모습이네요. ‘옛날에 옛날에’ 동심어린 시절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나도 낙타처럼, 아니 선생님처럼 늙었습니다.

‘낙타’라는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과 어느새 선생님의 나이에 이른 화자가 동일시되어 애틋한 옛이야기를 회상합니다. 그리운 시절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회초리처럼 엄중했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고, 등이 휘도록 열정을 다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반듯하게 살아온 내가 있지요. 오랜 세월을 건너온 시적화자의 따뜻한 그리움이 봄 향기처럼 훈훈하게 번져오는 시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등가물인 회초리의 그 엄격함을 존중하고 따랐던 순수의 시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타산과 인생의 목표에만 사로잡혀 이런 소중한 것들을 잊고 지내기 일쑤지요.

이제 아쉬운 것은,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가르치던, 좋은 인품으로 다정다감하시던, 동심의 초롱초롱한 시냇물을 맑고 푸른 말씀으로 가득 차도록 지극정성을 다 하시던, 그런 선생님이 드물다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낙타처럼 늙은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요. 낙타야말로 최고의 덕성과 헌신을 갖춘 동물이지요.

흰 꽃잎 나부끼던 교사 뒤 그늘로 돌아가 학창시절을 추억해 봅니다. 젊은 날의 높은 이상에 대해 꿈꾸듯 말씀하시던 B 선생님, 고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하라던 P 선생님, 넓은 가슴으로 사내다운 기개를 지니라하시던 K 선생님,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지닌 사람이 되라던 L 선생님. 그 어려웠던 시절에 혼신을 다해 가르침을 주시던 선생님들도 이제는 유명을 달리하고 저 세상에서 늙어가는 제자들을 내려다보고 있겠지요.

초여름의 햇살이 눈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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