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승당 복원, 보전관리와 함께 새로운 활용방안 모색 필요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④상당산성 : 신석기 사람들과 조우(遭遇)

상당산성은 포곡식 산성으로 분류된다. 계곡을 끼고 있다는 뜻이다. 삼국시대의 산성은 주로 산꼭대기에 있다. 멀리 볼 수 있고 적이 오르기 힘든 장점이 있다. 반면 많은 병력이 주둔할 수 없고 충분한 물과 식량을 비축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따라서 후대로 오면서 점차 물이 있는 계곡을 끼고 많은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을 택하기 마련이다. 포곡식 산성은 몇 고을 백성들이 피난할 수 있는 곳이었다.

▲ 튼튼한 축성을 위해 성벽 들여쌓기.

한편 삼국시대의 성벽이 높고 가파른 것에 비해 조선시대의 성벽은 낮고 두텁다. 그것은 전쟁에 대포를 사용하면서 그 충격을 견디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결과였다. 바깥쪽은 커다란 성돌로 가지런히 쌓고 안쪽으로 점차 작은 크기의 돌을 채우고 흙으로 덮은 모양이다. 대포알이 날아와 성벽을 때려도 버틸 수 있는 구조다. 남문 동쪽 치의 아래 부분은 고구려의 돌쌓기 기술을 채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성돌 위쪽에 단을 만들어 위쪽의 성돌이 바깥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하였다.

지금의 모습과 같은 성벽은 조선 후기 숙종 때 고쳐 쌓은 결과다. 1716년(숙종42)부터 4년간에 걸쳐 성벽을 고쳐 쌓았고, 19세기에 들어서도 성벽 보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둘레 4.2km의 산줄기를 따라 빠짐없이 성벽을 이뤘다. 그리고 세 곳의 성문과 두 곳의 암문, 서장대와 동장대, 그리고 십여 곳의 포루를 완성하였다. 이곳에선 3500명의 병사와 승려들이 배속되어 산성을 지키고 유지하였다.

산성안 구룡사 등 절터 3곳

공남문 안쪽 커다란 성돌에 새겨진 글귀와 그 앞쪽에 세운 구룡사(九龍寺) 사적비는 산성의 보수기록이다. 1802년(순조2) 여장의 완성, 1807년 충주 사람들이 동원되어 남문을 새로 만든 기록, 1809년 어딘가의 보수기록, 1836년 남문과 좌우 성벽의 보수 등 공사실명제의 자취이다. 그리고 1764년(영조40) 은재거사(恩齋居士)가 쓴 구룡사사적비는 산성 안쪽에 세 곳의 사찰이 있었고, 1716년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던 사실을 전한다. 구룡사사적비의 기록을 따라 구룡사 터로 향한다. 구룡사 가까이에 남악사(南岳寺, 南嶽寺)가 있었고 서장대 아래에 장대사(將臺寺)가 있었다. 구룡사는 1720년(숙종 46) 창건하였고, 상당산성도(上黨山城圖)에는 5동의 건물과 장고(醬庫) 등 66칸의 건물이 있었다. 지금의 옛 모습을 간직한 우물과 사적비를 세웠던 비좌가 남아있다.

▲ 상봉재의 마애선정비.

요즘 4차선 산성 도로에서 빈번한 사고소식이 들린다. 급한 경사와 무게를 이기지 못한 화물차가 길에 드러누운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전에는 명암약수터를 지나 구불구불 2차선 길을 통해 산성에 닿았다. 눈이라도 오면 차단되기 일쑤였는데 올초부터 걷는 길로 바뀌었다. 애초 2차선 산성도로는 일제강점기에 상령산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 뚫은 길이라고 한다. 실제 산성 안쪽 곳곳에 채굴 흔적이 있고, 동쪽 성벽 아래는 굴을 뚫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옛 조상들이 이용한 산성 통행로는 자동차 도로가 아닌 산길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상봉재가 고갯마루였다. 상봉재 못미처 남아있는 마애선정비는 당시 산성을 오르는 통행로가 이곳이라는 점을 확인해 준다. 다른 선정비와 달리 바위에 집 모양으로 만든 독특한 모양이다.

상봉재에는 이곳에 전해오는 옛 이야기를 옮겨놓은 안내판이 있다. 무신란 당시 봉화를 올리려는 극적인 이야기다. 실제 봉수대에는 백명의 봉수군과 보군이 속해 있었고, 25명씩 교대로 근무했다. 다시 25명은 5개 조로 나누었으니 (안내문 내용처럼)노인 한명이 맡았던 것은 더욱 아니다. 실제 임진왜란을 거치며 봉수가 필요 없다는 의견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백명의 효용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봉수대는 유지됐다. 지금 것대산 봉수는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됐다. 옛 모습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지만 5개의 봉돈을 세워 외적의 침입에 따른 다른 신호가 가능했다고 이해된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국난극복사에 방점을 찍었다. 따라서 전국의 많은 산성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예산을 들여 보수했다. 이에 상당산성도 1970년 사적 212호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의 방치 속에 3곳의 문루는 무너지고 성벽도 곳곳이 허물어졌다. 따라서 1970년대의 보수는 성벽의 위용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급속한 복원 속에서 제 모습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공남문의 기둥돌은 바깥으로 밀려나 있어 지금과는 다른 문루의 모습이었던 사실을 반증한다.

1982년 산성 안쪽에는 대규모의 한옥 마을이 들어섰다. 이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주거를 개선하고 관광 활성화를 위해 한옥과 음식점이 들어선 것이다. 한때 이곳 한옥마을을 성밖으로 옮기려 했으나 역시 예산 문제로 흐지부지됐다. 1990년대에도 옛 모습의 상당산성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계속됐다. 특히 상당산성의 옛 지도를 발견하면서 산성 복원의 밑그림이 그려진 셈이었다. 19세기 께 그린 상당산성도는 자세한 산성의 모습을 전한다.

주민참여형 한옥마을 활용방안 가능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동장대인 보화정(輔和亭)이다. 기단을 반듯하게 높게 쌓고 전부를 마루로 깐 오류가 있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이 쉬는 공간이다. 올해에는 서장대인 제승당(制勝堂)을 복원하여 산성이 또 하나의 명소가 되었다. 제승당은 1995년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제 모습을 갖추었다. 이제 산성 안 병력의 훈련과 지휘를 맡던 동·서장대가 모두 갖춘 셈이다. 아직도 운주헌을 비롯하여 성 안쪽의 여러 건물은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 것대산 봉수.

그런데 문제는 복원 이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다. 단순한 건물 복원은 그저 토건 사업에 불과할 것이다. 19세기의 상당산성도에 기초한 상당산성 복원은 그 활용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산성 안쪽에 점차 회복되고 있는 자연환경도 고려해 봄직 하다.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상당산성은 조상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산성 안쪽에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가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한옥마을 주민들이 아침, 저녁으로 성문을 여닫고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는 공간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옥은 무조건 철거할 것이 아니라 휴양림 열풍처럼 머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단체장의 영빈관을 이곳에 마련하여 청주를 찾는 귀빈들이 산성에서 숙박했으면 좋겠다.

마차가 다니고 활쏘기와 같은 고유 무예를 배우고, 전통의 먹거리를 만들고 먹을 수 있는 곳, 문명의 이기로부터 잠시 자유로운 공간, 뛰어난 자연환경과 옛 문화유산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걸어 두 시간 안팎의 성벽을 돌고, 지금도 줄지어 전통음식을 기다리듯, 그리고 반딧불이와 가재가 노는 천혜의 여건이 이미 마련돼 있다. 외적을 막기 위해 쌓고 천년 이상 보수를 거듭한 상당산성은 실제로는 한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은 평화의 공간이다. 상당산성은 평화를 염원한 우리 선조들이 후손에게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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