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사회읽기/ Artist 2창수

▲ Cover of the first edition of the publication Dada by Tristan Tzara; Zurich, 1917다다이즘 출판 초판, 트리스탕 차라, 취리히, 1917년

힘 있는 자의 논리에 의해 원치 않는 전쟁도 생기고 예술정신까지도 예술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예술가와 반전 지식인들은 1916년 취리히 볼테르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다. 자신들의 모임에 정당함을 느낀 참여자들은(Hugo Ball, Emmy Hennings, Tristan Tzara, Jean Arp, Marcel Janco, Richard Huelsenbeck, Sophie Tauber, Hans Richter) 아무 뜻도 없는 ‘다다’라는 이름을 통해 예술의 허무를 주장하였다. 오늘날도 현대미술의 중심에 있는 ‘다다’라는 이름의 기원은 허무하게도 사전에 종이를 끼워 넣어 우연히 발견한 글자라는 설, 루마니아어로 ‘예, 예’라는 설, 불어로 'hobbyhorse'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다다’는 기존문화자체를 경멸하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존가치관을 부정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즉흥적인 명칭이었다.

20세기 초에도 부자와 권력자는 있었고 그들 논리대로 세상은 만들어 졌다. 미술계에도 미술권력이 있었으며 대다수 미술가는 순응하며 살아야 했다. 다다이즘은 사회구조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힘있는 특권사회가 만든 결과를 우상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파괴로 이끌려했다. 열심히 부정한 다수의 작가 중 가장 대표적 작가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다. 그는 “예술품보다 예술가의 지적활동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작품이 가진 상징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이름에 의해 확대 해석되어지는 예술에 대한 비판도 했다. 보통 사람들이 바라보는 현대 미술을 보고 ‘이것도 그림인가?’ 또는 ‘나도 하겠다!’ 라고 느끼지만, 작가의 화려한 약력과 이름을 통해 아무 소리 없이 감탄사만 연발해야 하는 불편함을 1917년에 뒤샹은 샘(Fountain)이라는 작품으로 실험했다.

▲ Fountain, Marcel Duchamp, 1917샘, 마르셀 뒤샹, 1917

‘샘’은 물건이 장소를 옮기게 되면 사용에 대한 변화가 생기는 것에 대한 것,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닌 기존 공산품에 작가가 서명을 하면 작품이 되는 것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작가의 서명이 되었을 때도 작품이 될 것인가? 라는 사회와 미술계의 반응을 보려는 작가의 실험이었다.

뒤샹은 작가논리와 사회해석 대한 실험을 하였으나 2015년 6월 한국에서는 사회보건과 정부신뢰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메르스에 대한 정부의 발표로 공포가 사라질리 없겠지만 서로 잘못되었다는 남탓론이 난무한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어떤 것도 믿으면 안 된다.’이다. 내용 하나도 없는 좀비영화를 보는 듯 서로에 대한 의심을 통해 자신을 지키려는 모습은 육식 동물이 되어 서로가 잘못의 근원이라는 모습처럼 보인다.

문제해결이 상대부정을 통해 극복 가능할까? 사건이 발생되었다면 상대에 의해서라는 책임 유무를 따지는 것에 힘을 쏟는 것보다 문제 해결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식 동물의 마음으로 돌아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다다이즘은 사회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자신의 관점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상대부정을 통해 자신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을 부정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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