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토성을 쌓고 왕건이 나성을 쌓은 와우산성
곳곳에 절터, 성돌남아 2013년 첫 발굴조사의 아쉬움

<천년도시 청주, 다시 만나다>

청주는 삼국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천년 도시다. 기록 이전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 2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담고 있다. 청주청원 통합 1주년을 맞아 우리 지역 향토사를 문화유산을 통해 통사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향토사의 재정립을 통해 주민들의 애향심과 동질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통합 청주시의 10개 장소와 지역을 선정해 천년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본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통해 총 20회에 걸쳐 진행된다. <편집자 주>

연재순서
1~2. 와우산성 : 청주 역사를 지켜온 진산
3~4. 상당산성 : 신석기 사람들과 조우(遭遇)
5~6. 강서동 : 백제부터 조선까지 이야기의 산실
7~8. 북이면 : 독립운동가의 고향, 강화학파의 자취
9~10. 문의면 : 천년의 독립 군현, 그 전략적 가치
11~12. 성안동 : 돛대를 세운 청주읍성의 격랑
13~14. 오창읍 : 너른 평야, 사람이 북적이다
15~16. 내수읍 : 성군 세종의 향기, 그 길을 걷다
17~18. 오송읍·옥산면 : 옛 길과 첨단의 만남
19~20. 현도면(부강면) : 명문가가 살아온 길

▲ 와우산 전경.

우리에겐 우암산이 익숙한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의 ‘여지도서’에 와우산(臥牛山)이 처음 보인 이래 일제강점기 즈음부터 우암산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계에서는 기록에 보이는 대로 와우산으로 부르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대답은 그저 우암산이다. 본 연재에서는 학계의 주장대로 와우산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와우산은 청주시 상당구 수동과 우암동, 명암동, 용담동, 대성동 등지에 너른 산줄기가 펼쳐있고, 이곳에 자리 잡은 삶의 터전은 청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유물과 산자락 아래의 구릉에 만들어진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지금껏 남아있는 청주의 오랜 자취다. 그리고 백제 때 토성을 쌓기 이전에 이곳 산줄기를 따라 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이후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와우산은 평지의 청주 읍치와 함께 역사의 현장이었다. 조선 말기에 불린 것으로 보이는 서원팔경(西原八景)에도 여지없이 와우산이 등장한다. 무심천 언저리를 거닐던 시인의 귀에, “와우산 목동의 피리 소리[牛山牧笛]”가 들렸던 것이다.

‘우암산’ 근거부족, 옛 기록엔 ‘와우산’

우리 지역에 대한 비교적 소상한 기록을 남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청주목 산천(山川)에는 당이산만 보인다. 당이산은 고을의 동쪽 1리에 있고, 진산(鎭山)이며 토성 터가 있다고 하였다. 흔히 당이산, 혹은 당산은 와우산에서 갈라져 내려와 향교를 감싸는 끝자락에 있는 산으로 알고 있다. 마침 이곳엔 토성이 있으니, 지금의 당산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고을의 진산이란 표현이 주목된다. 진산은 고을마다 중요하고 큰 산을 골라 하나씩 정한 것으로, 고을의 상징적 수호 기능과 실제 방어시설의 역할을 겸하고 있으니 당연히 옛 성터가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진산을 기록한 예가 급감하고 오히려 주산(主山)이란 표기가 늘고 있다. 그것은 인근에 대규모의 석축 산성을 쌓으면서 방어 기능이 옮겨간 때문일 것이다.

한편 같은 책의 고적조에는 이름을 달리 적지 않은 산성(山城)이 있다. 산성은 고을 동쪽 2리에 있고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5022척(尺)이고 안에 네 곳의 우물이 있는데 당시에 이미 폐허라고 하였다. 산천과 고적에서 언급한 당이산과 산성은 거리상 다른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와우산과 지금의 당산은 한 곳을 지칭한 듯 보인다.

와우산이란 이름은 조선 후기 영조 때 펴낸 ‘여지도서’에 처음 언급된다. 충청도 청주목의 산천조에 당이산과 와우산을 동쪽 1리와 2리로 달리 보았고, 고적조에는 동쪽 2리에 산성이 있다고 하였다. 고적조 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여지도서’의 내용만 본다면 당이산과 와우산을 다른 산으로 분명히 구분하고 있어, 당이산=당산이라는 인식이 비로소 자리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지리 인식은 당이산은 와우산으로부터 와서 청주 읍치의 좌보(左補)라 하고, 와우산은 또 상령산(上嶺山)으로부터 와서 향교의 주맥(主脈)이 되었다고 하였다. 주변의 산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이은 산줄기로 보고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경표’ 등 실학적 관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에서 나뉘어 남에서 북으로 굽이쳐 한남금북정맥을 이룬다. 청주는 바로 한남금북정맥의 서쪽, 미호천을 넘지 못하고 너른 뜰과 산자락 사이에 위치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동여지도>는 끊이지 않는 산줄기와 그곳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 속 청주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고려 공민왕 7개월간 피난생활해

실제 백제 때 쌓은 와우산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단지 ‘고려사’에 919년(태조2) 왕이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았다는 것과 ‘고려사절요’에 930년 태조가 청주에 와 나성(羅城)을 쌓았다는 두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 후 1362년 공민왕이 청주에 머물렀을 때 무지개의 한쪽 끝이 내성을 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까지 피난 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중에 7개월 가까이 청주에 머물렀었다.

삼국이 국가를 세운 후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의 성곽은 우리 지역에 적지 않다. 그중 백제가 쌓은 산성으로 부모산성과 목령산성, 그리고 와우산성이 비교적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부모산성은 신라가 거듭 성벽을 쌓으면서 지금도 완연한 성벽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반면 와우산성은 발길에 채이는 성돌과 산의 정상과 줄기를 깎아낸 정도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고려 초기 왕건(王建)이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은 기록이 눈에 띤다. 왜 왕건은 청주에 성을 쌓았을까. 918년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청주 출신 인물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그리고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공주와 홍성이 견훤에게 항복하면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후백제나 신라로 가는 빠른 길에 청주가 있었다. 왕건은 청주를 진정시키지 않고서는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없었다. 끊임없는 청주 사람들의 반란과 후백제의 공세를 지켜내기 위해 청주는 왕건에게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왕건은 이곳에 성을 쌓고 민심을 어루만진 이후에야 비로소 후백제와 겨룰 수 있었다. 그 자취가 와우산성에 다시 쌓은 석축의 흔적이다.

▲ 당산의 판축 토성과 기초석(2013년).
▲ 토성 밑의 토광묘(2013년).
▲ 토성 위에 쌓은 석축(2013년).

2013년 첫 발굴조사 성벽 구조 확인

2013년 겨울 국립청주박물관 등이 펴낸 ‘청주 와우산성’ 보고서를 통해 우리 가까이에 있던 와우산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1980년 간단한 조사가 있었지만 33년 뒤에야 비교적 자세한 산성의 자취와 대략적인 현황을 알 수 있게 됐다.

와우산성은 해발 353m의 정상을 감싸고 서남쪽 방향의 계곡을 따라 길게 뻗은 길이 4857m의 성벽으로 남아있다. 와우산성은 내성과 외곽의 나성 부분으로 구분하여, 내성은 둘레 3069m, 나성으로 연결된 외곽을 포함하면 7~8km로 보고 있다.

먼저 내성은 세 부분으로 나뉜 3곽의 성벽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2곽의 서벽에서 3·1공원에 이르는 외성과 문수암 동쪽에서 이어져 향교의 뒤쪽을 지나 당산으로 이르는 외성 부분이 있다. 이 두 외성은 고려 초의 나성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당산의 토성을 독립 산성으로 본다면 이때에 와우산성과 당산을 연결한 나성을 쌓았다고 할 수도 있다.

2013년 당시의 발굴조사는 성벽 곳곳에 대한 부분적인 조사였으나 성벽의 구조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를 갖게 됐다. 원래 와우산성 성벽은 흙을 켜켜이 쌓은 판축(板築) 토성으로 처음 쌓은 뒤 언젠가 토성을 정리하고 그 위에 돌로 기초석을 놓고 여장(女墻)을 쌓았다. 그리고 토성을 쌓기 이전에 이미 산줄기 곳곳에 그보다 앞서 무덤을 만들었었다. 무덤 위의 토성, 그 위에 다시 석축의 산성을 쌓은 5~6백년 시간의 두께가 그곳에 있다.

와우산에 터를 잡은 사람들

와우산엔 옛 성터와 산자락에 기대어 많은 자취들이 남아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와우산 곳곳에 평탄지에 있었던 옛 절터이다. 지금도 기슭 곳곳 옛 절터에 새로이 세운 사찰이 적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은 목우사지 석조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70호)이다. 원래 수동 목암사 터에 있던 것을 최근 봉황사로 옮겨온 것이다.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의 불상이라고 한다. 앞서 1971년 천흥사(天興寺) 혹은 흥천사(興泉寺) 터로 전하는 절터에서 구리로 만든 종이 발견된 바 있다.

▲ 1971년 와우산에서 발견된 고려 동종(銅鐘).

1971년 와우산에서 발견된 작은 동종(銅鐘)으로 음통을 감싼 뚜렷한 용의 새김과 2구의 보살상, 천판 위의 입상화문 등은 고려 후기 범종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터가 정상 가까이 도교육청에서 만든 생태공원 자리다. 이곳 평탄지는 계단 모양을 이루며 절터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남쪽과 서쪽 계곡 안쪽으로는 사찰이 유지되고 있어, 통일신라~고려시대 와우산 자락에 연이은 고찰을 상상할 수 있다.

불교가 탄압 받던 조선시대에는 이전까지 향화(香火)가 이어지던 대부분의 사찰이 폐허가 되었다. 조선시대 와우산은 단지 청주의 진산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가뭄이 오래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보다 앞서 대성동 절터로 알려진 곳에 향교가 들어섰다. 조선시대 3단(壇) 1묘(廟)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기던 문묘(文廟) 곧 향교는 억불숭유 정책의 상징인 셈이다. 지금도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 한쪽에 석탑 옥개석이 뒤집힌 채 놓여있다.

▲ 우암산공원도로 표지석.

여흥민씨 묘, 당산까지 걸쳐 있어

와우산의 남쪽 자락은 여흥민씨의 묘가 여럿 있다. 굿당이 많은 용담동 가좌골을 따라 백운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여흥민씨분산(驪興閔氏墳山)’이란 새김글이 보인다. 이미 당산에 자리한 민영은(閔永殷)의 묘가 있어 여흥민씨의 자취를 알 수 있으나 그보다 먼저 청주에 일찍 자리 잡은 민씨들의 자취이다. 여흥민씨 민반(閔泮)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처음 청주 노천(蘆川), 지금의 남이면 양촌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와우산 남쪽 자락에는 1973년 서울에서 옮겨온 그의 할아버지 민휘(閔徽)와 아버지 민건(閔騫)의 묘가 있다. 한편 당산에는 후손들이 제기한 토지반환 소송문제로 시끄러웠던 민영은(閔永殷) 부자의 묘도 있다.

와우산은 오늘도 많이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도심 가까이에 완만한 높이와 비교적 초록이 완연한 공간으로 산을 오르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옛 성터가 있고 청주의 역사를 품은 공간이란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많은 발길에 패인 곳곳에 드러나는 옛 성터의 자취는 맨살을 드러낸 그대로다. 산이 좋아 찾는 만큼 역사의 자취가 훼손되고 있는 현실이다.

와우산은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기 이전까지 청주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생채기를 면할 수 없었다. 이곳 와우산과 당산은 일제강점기의 신사(神社)가 자리했던 곳이다. 지금은 당산의 명장사와 와우산의 대한불교수도원이 바로 신사터다. 해방 후 적산자본을 종교계가 수용한 결과이다. 물론 대한불교수도원 자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절터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그때의 연화대좌가 남아있다. 시대를 흐름 속에 신앙의 대상이 바뀌던 곡절이 남아있다.

덧붙여 와우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표충사를 꼽을 수 있다. 원래 읍성 북문 안쪽에 있던 것을 1939년에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열녀로 추앙된 기생 해월의 묘 아래 정려가 있던 곳이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의 배움터로 빠지지 않는 이곳을 고른 일제 식민당국의 속셈이 궁금하다.

삼일공원에서 3·1만세운동의 함성을 되새기고 최근 자동차 통행금지 논란이 있던 우암산순환도로를 걷는다. 이 도로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3년간 청주시가 노임소득사업으로 건설한 것이다. 1순환로 생태터널 직전 도로 위에 당시에 세운 표지석이 있다. 당시의 청주시장을 비롯한 관계자 명단, 공사기간, 사업비 등 소소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귀중한 향토사 자료다. 주변을 둘러보니 쌈지공원 정도는 조성할 수 있겠다.

<공동필진>권혁상 기자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자문> 강태재 전 청주문화사랑모임 대표
조혁연 충북도문화재전문위원

본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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