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요 지자(知者)는 요수(樂水)라 했거늘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청풍산하에는 요산요수가 가는 곳마다 즐비하니 어질고 슬기로운 자가 어찌 ‘피서 충북’을 마다 하겠는가.

 ‘송송백백암암회(松松柏柏岩岩廻) 수수산산처처기(水水山山處處奇)’ 소나무 잣나무 바위를 돌아서니 물과 산이 가는 곳마다 기이하더라...

 김 병 연(김 삿갓)의 명시가 어울리는 곳은 아무래도 화양구곡인 듯 싶다. 십 오리길 계곡으로 펼쳐지는 소나무, 잣나무 숲은 햇빛을 가려주고 기암절벽 사이로 흐르는 벽계수는 생활에 찌든 도시인의 마음을 깨끗이 헹구어 낸다.

 하늘을 받친 듯 길게 뻗친 경천벽,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운영담,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친 첨성대, 맑은 물과 금싸라기 같은 모래가 입맞춤하는 금사담 등 화양동 계곡은 가는 곳 마다 절경이다.

 화양동에는 맑은 물과 더불어 사시사철 선비정신이 청사(靑史)를 타고 흐른다. 조선 중기 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화양 서원을 근거로 삼아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끌었다.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 벼슬길과 귀양길을 번갈아 갔던 우암의 생애는 화양구곡 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로 조선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주자(朱子)에 비견하여 송자(宋子)라 불린 인물이다.

 따라서 충청도 일대에는 송시열에 관련된 전설, 일화가 많다. 어머니인 곽부인(郭夫人)이 송시열을 잉태할 때 명월주(明月珠)를 삼키는 태몽을 꾸었는데 아버지인 송갑조(宋甲祚)는 공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한다.(송자대전)

 우암이 늦은 봄날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데 근처 연못에서 맹꽁이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견디다 못한 우암이 “시끄럽다”하고 큰 소리를 치니 그 후로 한 여름이 지나도록 맹꽁이가 울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영진, 우암의 전설고)

 우암은 밤에 책을 읽을 때 등잔불을 켜지 않았으며 김집(金集)에게 공부를 하러 다닐 때 여우구슬을 먹고 다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우암은 허목(許穆)과 예송논쟁을 두 번씩이나 벌였다.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조 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 것이다. 이 예송논쟁으로 인하여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한번은 정적(政敵)인 허목(許穆)이 화양동을 찾았으나 송시열이 출타 중이었다.

 허목은 점잖게 시를 한 수 남기고 떠났다. ‘보지화양동(步之華陽洞) 불알송선생(不謁宋先生)’ 걸어서 화양동엘 갔더니, 송 선생을 뵙지 못했다...언뜻 읽으면 점잖고 평범한 시이나 음을 새겨보면 숫제 욕설이다.

 사액서원인 화양서원은 충청도 선비의 고향으로 학문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그 폐해도 매우 심했다.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묵패(墨牌)를 발행, 묵인을 찍어 군, 현에 발송하여 재물을 거둬들였다. 묵패를 받은 자가 이에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아가 마음대로 사형(私刑)을 가하였다.

 청주지역에서는 아직도 항간에서 “뭣 쥐고 화양동 간다”는 말이 회자된다. 화양동엘 가려면 몸을 굽히고 또 겸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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