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마다 세운 한국군 증오비…유사한 역사, 우리의 恨과 일맥상통
박종관 충북민예총 이사장 “그 앞에서 위령제 열 수 있게 해 달라”

충북민예총은 2004년 8월부터 베트남 푸옌성과 문화예술교류에 합의했다. 이후 해마다 두 지역을 교차 방문하면서 전통음악과 창작음악 등 공연, 미술·서예·사진 등 전시, 문학, 세미나 등의 교류를 진행해 왔다.

또 푸옌성의 요청에 따라 따이화현에 초등학교 건물을 지어주기로 하고 2006년부터 기금마련에 나서 콘서트, 작품판매, 책 인세 등을 모아 2007년 호아빈초등학교(현 푸트군 제2초)에 교실 8칸을 지어주고 책걸상, 컴퓨터 등 집기류를 지원했다. 이어 2014년에는 같은 방법으로 도서관 건립기금을 전달해 2015년 3월말 도서관이 완공됐다.

충북민예총은 푸트군 제2초 도서관 준공식이 열린 3월31일과 푸옌성 종전 40주년 기념식이 개최된 4월1일에 맞춰 대표단과 공연단 등 23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오고가는 길을 포함해 7일 간의 일정을 3개의 꼭지로 나눠 기사화했다.

①추모비가 아니라 증오비라니

보석 같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타고 노란나비가 팔랑거렸다. 네 마리인지 다섯 마리인지 불꽃같은 아지랑이 때문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일행이 탄 버스를 인도하는 것처럼도 보이고 나른한 오후의 평화를 깨는 버스의 질주를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푸옌성의 성도인 뚜이호아시(市)에서 화히엡남현(縣)을 찾아가는 길이다.

초록색 크레용을 꾹꾹 눌러 그린 것처럼 짙푸른 논과 야트막한 산들이 이어지는 풍경은 이 땅에서 언제 전쟁의 포성이 울렸냐는 듯이 평화로웠다. 비명과 통곡소리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40분을 달렸다. 이름도 낯선 ‘증오비’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증오비라니! 기념비나 추모비는 들어봤어도 증오비란 말은 귀에 설었다. 통역은 베트남말로 ‘비아 캄토우’를 직역하면 증오비가 맞는다고 했다. 그 비아 캄토우는 화히엡남 문화회관(마을회관) 앞마당에 장벽처럼 서있었다.

▲ 한국군 증오비에는 ‘비아캄토우’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박종관 충북민예총 이사장 등 대표단이 이름 모를 열대의 꽃을 비석 앞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사람의 키와 견주어 볼 때 계단으로 된 부좌를 빼고도 비신의 규모만 높이 5m, 너비 3m는 족히 넘어 보였다. 부좌와 비신의 재질은 모두 콘크리트였다. 도색을 했던 듯하나 빛이 바라고 검은 얼룩이 흘러내린 비신에서 비로소 그들의 증오가 선명하게 읽혔다. 비신의 끝에 ‘BIA CAMTAU’라는 글씨가 돋을새김으로 쓰여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경면주사를 칠한 듯 붉은 증오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글씨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워버린 것일까. 글씨를 새겼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도 싶었다. 우리를 안내한 푸옌성 문화관광청 관계자는 글씨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다. 만약 글씨가 없었다면 말문이 막혔거나 할 말이 너무 많아서였을 것이다. 박종관 이사장은 “마을사람들이 몰려와서 ‘당신들 뭐냐’고 따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15년에 걸친 미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 사람들은 열사비와 박물관, 증오비를 세웠다고 한다. 열사비는 말 그대로 전쟁영웅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성(省, 한국의 道와 같은 행정단위)마다 지었다는 박물관은 전쟁의 증거를 모아놓은 시설이다. 증오비는 민간차원에서 양민학살이 일어난 마을마다 세웠다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이를 ‘한국군 증오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미국과 베트남이 벌인 전쟁에 우리는 참전했을 뿐인데 왜 한국군 증오비란 말인가.

설명은 이렇다. “미국은 전투기가 없는 베트남을 상대로 공중전을 벌였다. 융단폭격이란 말도 베트남전에서 나왔다. 유엔이 사용을 금지한 네이팜탄이나 밀림을 사흘 만에 말려버리는 고엽제 폭탄을 융단을 깔 듯 투하했다. 그 이후에 마을로 들어간 것은 유일하게 전투병을 파견한 한국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몰려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증오비 옆에 있는 민가에서 우리를 초대했다. 학살이 이뤄질 당시 2살이었다는 50대 중반의 남자와 부인이 다과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맞이했다. 이름과 나이를 묻지는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전쟁 내내 한국군 부대가 주둔했던 마을이었다. 바로 이 집도 기지로 사용됐다. 화히엡남과 인근 화히엡중, 화히엡박(남, 중, 박은 한자어 南, 中, 北을 의미) 마을에서 100여명의 양민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 어린이와 여성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는 매년 음력 3월12일 증오비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

베트남어는 6가지 성조가 있어 높낮이가 심하다. 그래서인지 희로애락의 감정이 읽히기보다는 노래처럼 들린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눈빛에서도 적의가 읽히지는 않았다. 그는 도대체 무슨 감정으로 불쑥 증오비를 찾아온 한국인들을 맞고 있는 것일까?

▲ 증오비 옆 민가에 사는 50대 남성은 한국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비문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의 여러 단체에서도 이곳에 오고 대학생들이 답사를 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증오라는 단어를 지우라고도 했다. 그러나 지울 수 없다. 한국인들은 이곳에 와서 많은 약속을 하지만 지키지 않고 다시 찾아오지도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도 덤덤했다.

돌아오는 길에 실제 학살이 이뤄진 현장을 찾았다. 망고나무가 울창한 좁은 길이 끝나는 곳에 그곳이 있었다. 나른한 오후를 누리던 사람들이 낯선 차량의 방문에 눈길을 주었다. 카메라를 들고 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 박종관 이사장만 내려 한국에서 온 답사단이라고 설명한 뒤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창 밖의 촌로들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돌아와 푸트군초등학교 도서관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베트남을 방문한 도종환 의원과 증오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베트남이 1986년 도이모이(개혁개방) 정책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증오비를 철거하거나 비문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곳 푸옌에도 모두 2개의 증오비가 있었는데 도심에 있던 하나는 철거한 것으로 안다. 비문을 지우라는 성정부(省政府)의 지시를 주민들이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민들은 비문을 파내는 대신에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다른 마을의 증오비에는 대개 ‘하늘에 닿은 재앙 만대까지 기억하리라’는 문구와 함께 학살로 숨져간 사람들의 인적사항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남녀노소 심지어는 임산부의 뱃속에 몇 개월 된 태아가 있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증오비 앞 민가에 사는 그 남자가 말했던 “그러나 지울 수 없다”는 말의 함의가 그제야 또렷하게 읽혔다.

박종관 이사장은 한국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날 호오반디엠 푸옌성 문화체육관광청장과 만난 자리에서 “증오비 앞에서 위령제를 할 수 있게 해 달라. 2년 뒤 다시 올 때까지 고민하고 판단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푸옌성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박 이사장은 만남이 끝난 뒤 “10년 전 교류를 시작할 때부터 요구했던 것이다. 대답은 늘 ‘고민해 보겠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정서 때문에 고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뿐 성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증오는 역시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온 우리의 한(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귀에 설었던 증오비라는 말이 그제야 마음으로 읽혔다. 베트남 빈호아에서 전래되고 있다는 자장가마저도….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모두 쏘아죽였단다/ 아가야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