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들이 통곡하는 세상에서 홀로 잔잔해질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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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들이 통곡하는 세상에서 홀로 잔잔해질 수 있나
  • 충북인뉴스
  • 승인 2015.04.0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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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경리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오혜자 청주시작은도서관협의회장

책·책·책
오혜자 청주시작은도서관협의회장

가방에 넣고 다니며 짬이 날 때 한 편씩 읽는 시집이다. 펼쳐지는 대로 읽는 시 한 편으로 중심을 잃던 마음이 정리가 된다. 꽉 쥐지도 흘려버리지도 못한 자잘한 연민이나 자존심 같은 것들, 버리고 갈 것들이 잘 보이게 되는 눈이 좋아지는 시집이랄까. 이 한 권의 시집에는 끝내 내려놓지 못했던 노(老)작가의 마지막 짐들이 채워져 있다. 시의 문장은 나지막한 소리로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쓰여졌다. 읽다보면 시집 자체가 박경리 선생이 홀가분하게 떠나기 전 그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 한 방울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

작가 박경리는 2008년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전쟁과 분단을 겪었고, 전쟁 중에 남편과 사별했다. 연이어 아들도 잃었다. 소설 속 우리 국토를 무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수많은 등장인물이 작가의 내면에서 탄생한 또 다른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병적일 만큼 날을 세웠던 세월을 돌아보며 내 삶이 내 탓만이 아니지 않느냐고 독자에게 시의 언어로 물었다. 독자 1의 답은 “물론입니다”이다.

‘… 그러나 내 삶이 /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는 안다 /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 스승이 되어 주었고 /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 소리, / 그거야 글쎄 /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 시 ‘천성’ 부분-

대를 이어 이야기는 강물처럼 흐르고 장장 25년에 걸쳐 완성한 대하소설 <토지>는 5부 16권으로 이뤄졌다. 대를 이어 강물처럼 굽이쳐 흐르는 이야기. 박경리는 분명 ‘세기의 이야기꾼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유고시집에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있었다. 친할머니는 고담마니아인데다가 어머니는 잔치자리에 택시로 모셔가는 동네 이야기꾼이었다는 것이다.

‘…글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니는 / 이따금 / 유식한 이웃의 곰보 아저씨를 불러다 놓고 / 집안 식구들 모조리 방에 들라 하여 / 소위 낭독회를 열곤 했다 / 책 읽는 소리는 낭랑했고 물흐르듯 /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 그리하여 밤은 깊어만 갔다…’
- 시 ‘이야기꾼’ 부분-

나중에는 모두 버리고 갈 것들

한 줄 이야기에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는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선생은 일찌감치 알았던 게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진짜배기여야 한다는 것도. 작은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고 이야기판을 벌이는 것을 일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커서 이 시간들을 기억할까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결국 이야기와 책읽기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은 박경리 선생이 어릴 적 기억을 80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정리가 됐다. 이조차도 가장 나중에는 ‘버리고 갈 것' 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일 잘하는 사내'라는 제목의 시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왔다. 아마도 습작 중인 젊은이들의 질문이 있었나보다.

‘…다시 태어나면 /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 깊고 깊은 산골에서 / 농사짓고 살고 싶다 / 내 대답 // 돌아가는 길에 /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작가는 이들의 울음이 누구나에게 있는 순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장을 펼칠 때마다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보면 나의 내면에도 ‘순리에 대한 그리움'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4월이다. 아이들을 잃고 1년이 지났다. 다투어 꽃을 피워낼 4월에 이어 5월까지. 이 계절을 마주하는 심경이 참담하기만 하다. 박경리 선생은 자신이 떠난 이후에 우리가 맞이할 슬픔과 분노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는 모든 영혼을 위로하는 노래 ‘넋'이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탐욕 / 하여 / 가엾은 넋들은 지상에 넘쳐흐르고 / 넋들의 통곡이 구천을 메우나니’.

지금의 내 삶은 적지 않게 내 탓이다. 아직 홀가분해지기를 바랄 처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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