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제297호-

조선 3대 화승 신겸이 제자들과 제작, 인근 보살사 괘불도 완성
석가모니 중심으로 산(山)모양 위계따라 권속들 좌우 대칭 정렬

김덕근 시인·충북작가 편집장

▲ 안심사 영산회괘불

노루귀, 복수초 오시더니 통도사 홍매화도 만개했습니다. 짙고 무거운 황사바람이 봄이 왔다는 걸 알게 하지만 아직은 기다려야하나 봅니다. 그런데 이게 뭘까요. 가까이에 있는 베란다 화분에 봄이 온 것을 놓칠 뻔 했습니다. 겨울 내내 잠들어 있던 수선화 싹이 쏙하고 올라와있지 뭐예요. 뒤를 돌아보니 라벤더도 “나도 여기 있어”라고 연한 보랏빛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겹의 무명을 뚫고 자기의 길을 뚜벅뚜벅 걷는 생명의 빛이 오늘따라 크게 보입니다.

안심사는 구룡산자락에 있습니다. 천년고찰이지만 그리 알려 있지 않는 곳이기도 하구요. 절은 사동리에 있는데, 말 그대로 절골에 있다는 거지요. 절 앞의 마을도 ‘안심’이라고 불립니다. 안심이란 마음이 평평한 땅이 되는 것으로 고적한 길을 걸으며 모난 마음이 산골을 지나 절골에 갈수록 길손의 마음이 저절로 놓아지게 됩니다. 누구나 안심사에 오게 되면 절이름 따라 되는 것일까요. 개산 이래 향불이 꺼지지 않은 절치고는 참 조용하고 아담한 도량지만 영규대사의 승병이 집결했던 안심사는 청주성 탈환의 교두보이기도 했습니다.

▲ 영산회괘불 하단 사천왕

단골 소풍장소, 구룡산 안심사

절간 입구에서 낮은 언덕을 오르면 세월을 알 수 없는 느릅나무 몇 그루의 기운이 장난이 아닙니다. 일주문과 사천왕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늘 향해 뻗어있는 가지모양이 천수천안으로 나투어 허튼 생각을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안심사입니다.

안심사는 산지사찰이지만 나지막한 곳에 있어 한때 인근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이기도 했지요. 멀리는 부강이나 조치원에서도 올 정도였으니까요. 복스러운 누님만 해도/단골로 소풍갔던 안심사/잊었다가/모진 세파 몰려오면/꿈속에 그려만 보아도/늘 잔잔한 마음의 고향이었다(안희두:「안심사」) 요즘의 체험학습이나 피크닉도 아닌 먼 거리를 걸어야 했을 테니, 안심사는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는 마음의 고향이었을 겁니다. 당시의 소풍사진을 보면 대웅전 앞마당에도 요사채나 전각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심의 어린이들에게 대웅전 싸리나무 기둥이나 칡덩굴 대들보와 청기와는 어떻게 그려졌을까요.

안심사에서 안심을 해주는 건 어쩌면 영산전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는 300년 묵은 괘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괘불이라 함은 평상시엔 둘둘 말아 두었다가 절간에 큰 재가 있을 때 내어 거는 부처를 말하지요.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기우제를 지낼 때에도 괘불을 걸었습니다. 전각의 정적 공간과는 달리 괘불이 펼쳐지면서 그 마당은 열린 공간에서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거지요. 괘불을 펼치면 그 자리가 성지가 되어, 경건함과 환희심이 솟아나게 됩니다. 괘불을 건다는 건 들을 거리, 볼거리 먹을거리가 있어 사부대중을 아우르는 화려한 축제마당이 사흘밤낮으로 펼쳐졌으니 구룡산 일대가 장관이었을 겁니다. 안심 절골의 재는 어땠을까요.

▲ 영산회괘불 하단 사천왕

괘불 세번만 보면 극락왕생(?)

괘불은 아무 때나 펴지 않았습니다. 현재 대웅전 옆 괘불은 복사본으로 365일 괘불대에 서있는데 지나간 영화간판처럼 보이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괘불은 괘불함에 있어야하고 재가 있을 때 괘불의식을 거쳐 사찰의 중앙에 모셔야하는 거지요. 볼거리가 없었을 때 전각을 덮을 정도 큰 괘불은 장엄했을 겁니다. 대중들은 괘불 세 번만 보면 극락왕생한다하여 백리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큰 괘불은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기 때문에 중생들의 염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신통력도 함께 한다고 믿은 거지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괘불은 100여점 뿐 인데, 국보는 10점도 되지 않지 않습니다. 석가의 영축산 법회를 재현한 안심사 ‘영산회괘불탱’은 국보로서 충청권 으뜸의 괘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영축산 석가설법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그림이 영산회 괘불입니다. 남아있는 괘불탱에서 가장 많은 건 영산회괘불탱입니다. 법화경 서품에 근거하여 고스란히 옮겨 영산정토를 고스란히 옮긴 것이지요.

17세기 이후 걸개그림이 많은 건 무슨 연유일까요. 큰 전쟁이후 여유도 없었을 텐데, 괘불불사의 의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전쟁 이후 초토화 된 국토, 굶주림, 역병 등의 피해로 구천을 떠도는 중음신을 달래고, 중생을 위로 하며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천도의식을 할 수 밖에 없던 겁니다. 불교의식인 영산재는 원한을 위로하고 풀어주는 살림의 굿판이었던 거지요.

괘불을 옮기는 괘불이운을 시작으로 노래공양인 범패, 춤공양인 작법이 모든 중생에게 공양을 올리는 재는 불교의식의 꽃입니다. 최치원은 범패의 소리를 ‘금옥같은 소리가 구슬프게 퍼져나가면 상쾌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여 능히 제천을 기쁘게 할만하다’ 하였는데, 안심사 구룡산자락에서도 장엄한 생명의 기운이 법고와 풍경소리와 그윽했을 겁니다. 바라춤 나비춤 범패가 어울리고 허공에 걸리는 괘불 또한 눈부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비로움이 차오르는 거지요. 아쉽지만 일제 강점기 총독부 사찰령 이후 금지되었기에 불교의 사찰의궤는 쇠퇴의 길에 서게 되어 범패의 보존차원에서 명맥만 남아있습니다.

안심사 괘불은 영산전 괘불함에 모셔져 있습니다. 괘불이 걸리는 날은 안심사 인근 사람은 물론 다른 지역의 사람도 산을 넘어와 구룡산자락이 울긋불긋 했을 겁니다. 안심사 괘불은 대대로 비장되었다고 하는데,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5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촌로들에게 구전된 이야기로는 솔거작품이라고 전해지는데, 괘불에 대한 사동리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솔거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 안심사 전경
▲ 안심사 영산전 괘불함

화승 등 9명이 2개월 동안 작업

괘불에는 제작 년대 제작자, 시주자, 재료 등이 기록되어 있는 화기가 있습니다. 안심사 괘불이 아래에 있는 화기를 보면 그림을 그린 그림은 신라의 솔거가 아니라 조선의 신겸이라는 화승을 중심으로 모두 9명이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기는 불화의 이름, 조성시기, 화승, 시주자 재료 등을 알 수 있는 탱화의 QR코드와 같지요.

괘불은 혼자 그리기 쉽지 않아 불모(佛母)라 불리는 화승의 큰 스님과 그 제자들이 함께 그렸던 거지요. 화승은 금어(金魚)라고도 불렀지요. 안심사 괘불은 어디서 제작되었을까요. 실제 괘불보다 더 큰 자리가 있었을 텐데, 지금의 대웅전이나 영산전은 아닌 듯합니다. 괘불 보다 큰 전각이나 누각이 있지 않았을까요. 제작기간은 청곡사, 장곡사 괘불이 40~60일 정도 걸렸다고 하니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겁니다. 대개 괘불은 봄, 가을 비가 내리지 않은 철에 제작된 점으로 보면 영산회괴불탱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괘불을 그리기 전 목욕재개를 하고 새 옷을 입고 금줄을 치고 신장불공을 올린 다음에 붓을 들었던 거지요. 법열삼매를 느끼며 괘불의 마지막 고비인 부처의 눈을 그렸을 신겸 스님을 떠올려 봅니다.

안심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낙가산 보살사와 운주산 비암사 괘불을 그린 신겸은 조선 3대 화승의 한분입니다. 비암사 괘불은 안심사 괘불의 도상 배치와 구도가 한 모본으로 보입니다. 삼사 순례를 하며 괘불 모두 만나는 서원을 세워봅니다. 신겸 채색의 특징은 주홍과 흐린 녹색을 많이 사용하였고, 부처와 보살은 황색, 나한은 흰색과 붉은색 느낌이 강합니다. 보색 대비하여 본존의 신비로운 인상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화려함과 입체감을 갖게 한 거지요.

신겸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권속들을 산(山)모양으로 위계에 따라 좌우 대칭으로 정렬시켰습니다. 한가운데 당당하고 근엄함의 부처모습에서 조선인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키모양 광배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광배 문양의 섬세함은 어떻하구요. 석가모니의 옷주름과 옷감의 문양은 얼마나 세밀한지요.

본존불과 멀어질수록 벽지불과 화불의 크기는 작아져 위로 갈수록 천계의 세계는 오히려 좁지만 넓은 느낌과 상승효과를 줍니다. 얼굴의 색채로도 깨달음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록에 갇힌 괘불과는 달리 허공에 걸린 괘불은 부처의 서사적 재현 이외의 어느 방향에서도 균형 잡힌 비례를 보여 주어 큰 호흡을 머금게 합니다. 영산회상의 수많은 대중과 모든 보살과 제자를 표현하지 않고 가감하여 그려서 괘불에 등장하는 권속의 이름을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괘불의 중심에 석가모니인 것은 당연하고 그를 둘러싼 여러 호위신중과 권속을 표현한 것으로 법화경전에 따라 충실히 그린거지요. 전방 좌우의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가섭과 아난의 경우는 지물이나 얼굴의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단양 구인사의 영산재

일년에 한번만 내거는 괘불

부처의 정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나 신장은 괘불의 내용을 보호하는 거지요. 괘불 아래의 부처님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자리하고 있지만 위엄이 있거나 부리부리한 눈이 아니라 하얀 눈에 단순한 점하나가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천상의 공간인 상단의 오색구름은 화불이 타고 다니는 구름일까요. 꽃구름 켜켜이 이어져 상서로운 기운에 천녀들도 노래를 부르며 금방이라도 내려 올 듯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수행의 하나이기 인지라 회향을 할 때까지 신겸은 지극정성을 다했을 겁니다. 괘불을 만나고 오는 길 허장무 시인의 ‘안심사 가는 길’을 펴니 ‘안심’의 울림이 내려옵니다.

잠종장 탱자 울타리 한참 지나 길게 논둑길 넘어서면 가을 햇살 아직 등때기가 따숩고 명암지를 지나온 바람 보푸라기 한 옴큼씩 달고 풀씨 몇 알 아무데나 몸을 낮춘다. 문득 안심사 대웅전 댓돌 위에 평안히 앉아 가물가물 탱화나 바라볼 나이 뉘엿뉘엿 해 다 기우는 때 인가의 감나무들 잎 다 떨구고 비로소 홍시를 익히고 있다.

<허장무: 「안심사 가는길」>

참 편안한 풍경입니다. 안심사 대웅전에서 시인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어느 가을날 다가온 ‘따뜻함’과 ‘낮춤’은 저절로 들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댓돌에 앉아 발견한 건 잎을 다 떨구고 홍시를 익히고 있는 감나무입니다. 홍시를 바라본다는 건 단순한 바라봄이 아닙니다. 소멸의 계절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드러내고 있는 그 무엇을 비로소 보게 된 거지요. 거기 바로 ‘안심’이 있고 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1년에 한번 걸어지는 안심사 괘불을 보려면 구룡산에 와야 합니다. 내 마음의 먼지를 털지 않더라도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 질테니 절대 안심하시구요.

<연재를 마치며>
충북의 국보를 통한 문학지리와 장소성을 찾는 작업은 이제 끝이 아닙니다. 장소의 기억과 관계를 그물망으로 엮어 다양한 콘텐츠로 재현해야할 의무는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하고요. 우리지역 우리장소는 가장 가까이에 있기에 소홀히 여긴 부분도 있을 겁니다. 신춘입니다. 독자의 숨어있는 장소 하나를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