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림부대 마지막 생존자 87세 이영수 1공격소대장의 절규
“대원 316명 삶 66년 간 왜곡…명예회복하고 눈감았으면”

‘우측 대퇴 및 골반의 다발성 이물질’ ‘좌측 견갑부 파편창’ ‘목부위 파편창’ ‘우측 완부 관통총창 및 파편창’ ‘척추 전방 전위증 천추 제1번에 대한 요추 제5번’ ‘좌측 고관절 부분 치환술 상태’ ‘우측 대퇴 전자간 골절 유합상태’, 중앙보훈병원이 진단서에 명시한 이영수(87·남양주시) 옹의 몸 상태다. 10여 일간의 북파 작전에서 입은 부상과 그 후유증들이다. 

호림부대 6대대 1공격소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한 이 옹은 66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진 7월 7일 가마골에서 관통상과 후두부 파편상을 입은 채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김현주 대대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원이 전사하고 나는 남은 병력에 후퇴를 명령했다.”

부상을 당한 김병제·권오덕과 함께 12일간 후퇴한 이 옹은 38선을 넘어 상남에 도착했다. “김병제는 내려오는 중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악화됐다. 결국 수류탄 2개를 달라는 그의 부탁을 수락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옹에 따르면 김병제는 수류탄 하나를 적군을 유인하는데 던지고, 나머지 하나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숨까지 희생한 전우의 도움으로 상남에 도착한 그는 홍천에 주둔한 야전병원에서 1차 치료를 받고 부평 제1육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1949년 11월 군을 떠났다.

▲ 북파 유격대 호림부대의 유일한 생존자 이영수 옹. 87세 고령의 이 옹은 당시 입은 부상과 후유증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보다 더 혹독한 66년의 삶
스물한살의 나이로 호림부대에 지원해 북으로 침투한 이영수 옹. 죽음의 문턱에서 사지를 뚫고 귀환했지만 그에게는 전쟁터보다 더 혹독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침투 명령을 받을 당시 정부가 약속했던 포상은 고사하고 1949년 7월의 이야기는 꺼낼 수도 없었다. 호림부대원들은 흡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과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으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이 옹은 “이 사건을 두고 북한은 1949년 6월 29일 호림부대가 먼저 북침했다고 악선전에 이용했고, 이로 인해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정부는 호림부대를 민간부대로 취급했고, 그마나 생존 동지들이 탄원해 1986년 전적비라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호림부대원에게 부여된 군번도 사후에 부여된 것이다.

1929년 평양시 경창리에서 태어난 이 옹은 17세가 되던 1947년 평양에 위치한 남로당 무기창고를 습격했다. 이 일로 형과 숙부가 체포됐고, 이 옹은 이를 피해 월남했다. 월남 후 경찰이 되기 위해 경찰학교에 입교한 그는 이후 동향 사람들의 권유로 수색학교에 입교해 호림대원이 됐다. “우리 대원들은 대부분 평안도 사람들이다. 호림부대 명칭도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이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하는 데서 지어진 것이다. 우리는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고향에 가서 빨갱이로부터 가족들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 모든 대원들의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고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이 옹은 당시 끌려간 숙부와 형이 처형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극우반공의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전쟁은 마무리됐지만 부상당한 그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후 결혼을 했고, 2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못했다.

“백선엽 위폐로 엄청난 부 쌓아”
아내 임순애(79) 씨가 사실상 집안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취재진의 질문에 이 옹의 아내는 “아이들이 고생했지”라고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내 “이렇게 찾아와서 도와준다고 입막음만 해놓고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애써 눌렀던 감정을 표출했다. 그는 “행상부터 파출부까지 안 해본 게 없다. 국방부의 누구, 정부의 누구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달래기만 하고는 그때 뿐”이라고 말했다.
이 옹은 66년 전 세상에 살고 있다. 그와 함께 사는 아들과 아내는 그 만큼이나 당시 상황을 잘 안다. 살림에 보탬이 돼주지 못한 그가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당시의 무용담과 그에 대한 보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옹은 “이제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나. 유족회가 소송을 준비한다고 하지만 그 결과나 보고 죽을 수 있을 지 의문”이라며 일각에서는 한국전쟁 영웅으로 평가받는 백선엽(94) 예비역 대장을 겨냥해 독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 옹은 지난 2009년 국방부가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백 장군을 명예 원수(5성 장군)으로 추대하는 방안이 검토될 당시 국방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원수 추대를 반대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호림부대를 창설될 당시 부대가 속해 있는 육군본부 정보국장(당시 대령)을 지낸 백 장군은 이후 행사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한 사이지만 지금 그에게는 누구보다 원망스러운 사람이다. 2008년 진실화해위가 호림부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당시 정보국장이자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을 맡았던 백 장군에게 책임여부를 묻자, “호림부대는 육군본부 정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됐다.

 

▲ 한때 백선엽(가운데) 장군과 함께 기념촬영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던 이영수 옹(사진 왼쪽)

이 옹은 “호림부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백선엽이다. 60여년간 국가보안상의 이유로 묻혀있었던 호림부대원의 특수임무수행과 관련해 국가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해 전사한 전우들을 저버렸다”고 평가하며 충격적인내용을 전했다. 이 옹은 2010년과 2014년 백 장군에게 보낸 내용증명의 글에서 “1949년 6월 29일 호림부대원 316명이 북파 될 당시 귀하는 특수임무수행을 위해 이승만 정부에서 비밀리에 발행한 북괴의 위조지폐를 빼돌려 그 돈으로 함경도 일원에서 명태를 수입해 남은 이익금으로 남한의 페니실린 등을 다시 적국인 북한에 밀수출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선엽이 나를 고발한다면 재판과정에서 파렴치한 행적을 낱낱이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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