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사회 교란, 군사장비 수송 요충지 파괴 등 목적으로 1949년 창설
1949년 6월 29일, 2개 대대 240명 북파…160여명 전사, 30여명 생환

김관국(81·명암동) 씨는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던 형의 죽음과 관련한 일들에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어느 날 사라진 형이 1949년 북한군에 의해 처형된 후 김관국 씨의 인생은 형의 짧은 생애을 기록하고 그의 죽음이 조국을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에 몰두했다. 그 하나의 방법이 죽음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정부는 형과 전우들의 위패를 현충원에 안치하고, 전적비를 세우면서도 보상만은 관련법을 근거로 거부하고 있다. 수십 차례의 진정에도 이 같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김 씨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충청리뷰 864호 표지이야기는 지난 수십년간 함구했고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입에 담을 수 있었던 김관국 씨의 형 故 김관수 씨와 그가 소속된 유격부대 이야기를 담았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 북한이 심장부를 향해 돌진한 ‘호림부대’는 어떤 부대였고, 어떤 목적으로 창설돼 어떻게 사라졌는지 마지막 생존자와 유족, 정부의 공식 기록을 통해 알아보았다.

▲ 대한민국 최초의 북파 특수부대인 호림부대. 창설 4개월 만에 북파된 호림부대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북한군에 포위돼 전멸되다시피 했다. 특히 생포된 호림대원들은 평양에서 공개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진은 2007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호림부대 공개재판 장면.

1950년 6월 25 새벽, 김일성 내각총리가 이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선 아래로 쳐들어오면서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시작됐지만 38선을 경계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크고 작은 군사충돌은 그 이전부터 진행됐다.

1948년 11월 25일 육군총사령부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위치한 수색 제1여사단사령부 내에 육군 수색학교를 만들었다. 설립 취지는 게릴라를 토벌하고 북한으로 파견해 유격전을 벌이는 특수부대원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호림부대가 창설된다. 호림부대의 시작은 1947년 서북청년회 영동지구본부가 주도한 민간단체인 계림공작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 4국 소속 동해특별대로 개편되고, 1949년 2월에는 이범석 국방부장관의 발의로 호림부대가 창설된다.

정부, 귀환 시 군 특채 약속
동해특별대는 북파 목적으로 3개월간의 특수훈련을 받았지만 남북 충돌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미군의 뜻에 따라 국방부 제4국이 해체되면서 함께 해체됐다. 동해특별대는 국방부 소속이었지만 호림부대는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으로 변경됐다. 당시 정보국장은 백선엽 대령이었다.

316명의 호림부대원은 조건부 신분이었다. 대북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면 그때 정식 군인이 되는 조건이었다. 총지휘관은 정보국 특무과장 한왕룡 소령이었고, 부대장은 강종철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날, 1949년 6월 23일 전체 호림부대원 가운데 5대대와 6대대 소속 240명은 북파 명령을 받고 수색학교에서 출발했다.

출발 전 채병덕 총참모장은 훈시를 통해 북파 목적과 함께 귀환 후 주어질 혜택에 대해 설명했다. 관련 자료(호림부대 제6대대 작전상보 등)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채 참모장은 “설악산을 거점으로 동부 산악지대를 북상해 적의 경계가 약한 읍과 면의 행정기관을 기습하고 교량 및 주요 도로 파괴, 창고 방화, 정당 사회단체 간부 암살을 통한 민심교란, 군사기밀 탐지” 등을 지시했다. 또한 귀환하면 현역군으로 특채하고 포상할 것도 약속했다.

서울을 출발한 이들은 6월 29일 마침내 38선을 넘었다. 그날은 비가 주적주적 내리고, 안개도 자욱하게 끼었다. 대원들은 북한군 복장을 하고 일본군이 사용하던 99식 소총과 TNT폭탄, 수류탄을 가지고 태백산맥을 넘었다. 백의곤 대위이 이끄는 5대대가 선봉에 서고 김현주 대위가 이끄는 6대대가 뒤를 따랐다(진로 참조). 점봉산을 넘고 박달령을 거쳐 양양지구 오색촌으로 침투한 호림부대는 계속 북상해 설악산 대청봉에서 동북쪽 6㎞지점에 위치한 봉정암에 집결했다.

이곳에서부터는 대대별로 나누어 이동했다. 1949년 7월 1일 5대대는 영동지구로 나섰고, 6대대는 영서 중부 고원지구로 향했다. 이들은 7월말 양덕 맹산지구에서 다시 만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날이 그들이 함께한 마지막 날이 되고 만다.

이들의 침투사실이 알아챈 북한군이 경비를 강화한 것이다. 영동지구로 나선 5대대는 7월 10일부터 1개 소대 병력의 추격을 받았다. 양덕으로 이동하던 5대대는 북한 추격대와 수차례 총격전을 벌였고, 적지않은 전과를 올렸지만  7월 16일 국사봉 부근에서 적들에게 포위되고 만다. 5대대는 국사봉에 도달해 삼각고지를 점령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7시 30분, 대대적인 총격전이 벌어졌다. 120명으로 출발한 5대대는 이 전투에서 백의곤 대대장을 비롯해 대다수의 대원들이 희생됐다. 일부는 화전민의 도움을 받아 원대에 복귀했지만 생환대원수는 24명 뿐이었다.

영서 중부고원지구로 향한 6대대는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미 이들의 침투 첩보를 입수한 북한은 3개 사단 병력을 배치했고, 포위망을 좁혀갔다. 7월 4일 용대리 내무서를 습격한 후 7월 7일 서화리로 이동한 6대대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북한군에 의해 대부분 전사했고, 12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 대한민국 최초의 북파 특수부대인 호림부대. 창설 4개월 만에 북파된 호림부대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북한군에 포위돼 전멸되다시피 했다. 특히 생포된 호림대원들은 평양에서 공개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진은 2007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호림부대 공개재판 장면.

육군본부가 발행한 ‘한국전쟁과 유격전’에는 “북괴군의 남침계획을 사전에 분쇄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북한 지역으로 침투한 지 불과 2주일여 만에 임무도 제대로 수행해 보지 못하고 침투 도중 와해되었다”고 기록하며 “이러한 원인으로는 장비상태 미흡, 지도력의 결여, 유격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면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제대로 특수전 훈련을 받지 않고, 적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유격전 임무를 수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호림부대의 작전경과를 통해 알 수 있겠다”고 평가하지만 당시 참전 대원의 증언은 이와 달랐다.  

호림부대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생환 대원 외에 모두 사살된 것으로 알았지만 곧바로 북한은 호림부대원 가운데 106명을 사살하고, 44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공표했다. 북한은 이들이 주민 11명을 납치하고 29명을 살해했으며 가옥 11채를 파괴하고 소 15마리를 죽였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38선 인근 전답 1만 1859평에서 농사를 방해받았고, 4800평에서 제초를 하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했다. 호림부대의 활동을 민간인에 대한 학살로 정의했지만 피해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북한이 받은 충격을 엿볼 수 있다.

생포된 호림부대원 가운데 상당수는 세포(현지 지원책)였지만 생포된 호림대원과 현지 지원책들은 1949년 8월 28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10여일 뒤인 9월 11일 형이 집행됐다.

1949년 2월 대한민국 최초로 창설된 북파 특수부대인 호림부대는 4개월만에 북파됐고, 북파된 지 10여 일만에 대부분 전사했다. 현재 현충원에는 176명의 호림대원의 위패가 모셔졌지만 단 한 구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 호림부대 작전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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