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요청에 법주사 방인혁 공덕비 자진철거
청주향교, 일제 김동훈 지사·이해용 청주군수 공덕비 철거 거부

2015년 올해는 일제를 벗어나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다. 하지만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한 역사적인 청산작업은 부진했다. 해방 60년만에 정부의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돼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또한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해 4776명의 친일행적을 세상에 알렸다.

도내에도 상당수의 친일파 행적이 드러났고 그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뒤따랐다. 지난 1996년 청주 우암산 3.1공원의 정춘수 동상 철거가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음성 이무영 문학제가 중단됐고 제천 반야월 기념관도 계획이 백지화됐다. 최근에는 보은 법주사가 경내에 있던 친일파 방인혁의 공덕비를 자진철거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가 작년부터 철거를 요구하며 거리홍보전을 펼친 끝에 얻은 결과였다. 하지만 청주시내 향교에는 일제 당시 도지사, 군수를 지낸 친일파의 존성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십수년전부터 논란이 됐으나 한차례 내부 논의를 끝으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 철거 전 방인혁 공덕비.

충북 출신 중추원 참의 1호

방인혁은 1877년 보은에서 태어나 경성에 살고있던 부재지주의 마름을 지냈다. 1905년 평북관찰부 주사로 관직을 시작해 19011년 청주군 참사로 임명돼 충북으로 돌아왔다. 군수의 지방통치 자문역을 맡은 군참사는 일제에 협력적인 지역 유력자들이 맡았다. 1912년 청주군 축산조합장에 선출됐고 1915년 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청주군 사주면에 자위단을 설립해 헌병대와 협조해 야경활동을 했고 1919년 3.1만세운동 뒤에는 내선융화를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지역 유지들과 청주자제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20년 도평의회 제도가 신설되었을 때 관선 충북 도평의회원으로 임명됐다. 이 무렵 물류업자로서 조선운수창고, 충청흥업 등의 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1921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돼 충북 출신 1호를 기록했다.

한편 21년 총독부 기관지 ‘조선’ 10월호에 ‘국민의 융성은 여기에 있다’는 친일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 “조선의 제도는 병합 이전은 논할 가치도 없고, 조선총독부 통치 이후로 제반 시설과 정치 개량에 전념하여 기관·제도 및 시설방침이 지극히 주도면밀하다고 할 수 있다.‥‥병합 이후 10여년동안 법령개정, 민도향상은 격세지감이 있을 정도”라고 하면서 “그 방침의 현명함과 적용의 효과는 실로 장래 조선통치상 가장 적절하고 중대한 것”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청주 지역 유지로 평생을 일제에 적극 협력하다 1935년 사망했다.

▲ 법주사 수정암의 철거결정을 이끌어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

1924년 청주군 지방공로자 표창을 받은 것을 비롯해 1928년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고, ‘광영록’에 이름이 올라 있을 만큼 공을 인정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1935년 한일병합 조약체결 25년을 기념해 방인혁을 민간인 공로자로 선정해 시정 25주년 은배 1조를 내리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과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지역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방인혁 공덕비는 속리산 법주사안에 있는 수정암 암자 부근에 세워졌다. 1920년대 수정암 건립에 자금을 보탰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공덕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을 접한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는 지난해 6월부터 공덕비 철거운동에 나서 3차례의 현장방문 활동을 벌였다. 방인혁의 친일행적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고 법주사측에 공덕비 철거를 요청했다. 한편 법주사측은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요청에 따라 종무회의를 거쳐 말사인 수정암측에 공덕비 철거를 권고했다. 수정암측은 현재 보은에 거주하는 방인혁 유족들과 협의를 거쳐 지난해말 최종적으로 자진철거를 결정했다.

이에대해 법주사측은 “종무회의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여론에 비춰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진작에 내렸다. 하지만 독립적인 말사인 수정암에 강제할 규정은 없고 종무회의 의견으로 권고했다. 수정암에서 유족들과 협의과정이 필요했고 다행히 해가 바뀌기 전에 자진철거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광복 70주년, 청주 도심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공덕비
청주향교 “친일 행적자료 구체적 제시하면 재논의하겠다”

청주시 대성동 청주향교의 주차장 한켠에는 5개의 존성비가 세워져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존성비(尊聖碑)란 최고의 존경심으로 높은 뜻을 기리는 의미있는 비석이다. 문제는 이 가운데 2개의 비가 일제때 세워진 것이며 당시의 충북지사 김동훈과 청주군수 이해용의 존성비라는 점이다. 두 사람의 존성비는 38년에 동시에 건립됐고 특히 이해용은 매국노 이완용과 6촌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도 출신인 김동훈은 일제의 관립 일어학교를 나와 도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까지 지낸 대표적인 친일관료이다. 오늘날 교육부라고 하는 학부의 말단관리도 들어가 9년만에 강원도 홍천군수가 된 김동훈은 조선을 병합한 후에는 공이 많은 자에게 일제가 주는 병합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중일 전쟁 기간 중 충북지사를 지냈기에 조선군사후원연맹과 같은 전쟁 지원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김동훈은 충북지사 시절 '내선일체론'이라는 책을 저술해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을 선전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

이해용은 고등문관 이상 관료로 경찰 간부(강화경찰서 경부)로 3.1운동 관련자들을 신문한 전력이 확인됐다. 1924년 충북 진천군수를 시작으로 36년 청주군까지 도내 6개군 군수를 맡는 관운을 과시했다. 일제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 시정25주년 기념 표팡과 은배 1조를 받았다. 일제말에는 함북과 경북에서 고위관료로 활동했고 해방이후 반민특위에 자수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됐다.

<충청리뷰>는 지난 95년 월간 8월호에 친일관료의 존성비 보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청주향교는 주차장 신설등 주변공사를 하면서도 두 사람의 존성비를 그대로 세워두고 있다. 청주향교측은 “과거 증개축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언론보도 이후에 한차례 내부 논의를 거쳤는데 구체적인 친일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그냥 두기로 했었다. 역사적인 실증자료가 있다면 다시한번 내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 하나 건너 3 1공원의 친일파 정춘수 동상은 광복 51주년을 맞은 지난 96년 시민들의 손에 의해 끌려 내려왔다. 지역에서 유일한 친일관료의 존성비가 과연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도 존치될 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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