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만 해도 중앙공원 앞을 지나 남주동 시장으로 빠지는 길은 간선도로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이 골목길에는 잡화상, 포목점 등이 들어서 있었고 젓가락으로 상 모서리를 두드리며 취흥을 돋우는 속칭 ‘니나노 대포집’도 여러 채에 달했다. 귀가 무렵 직장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선술집이다. 립스틱과 화운데이션 짙게 바르고 “오빠, 한 잔 하고 가셔...” 하는 아가씨들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던 골목이다.

 청주시는 남사로 4차선을 개설하며 게 딱지처럼 붙은 도로변 가옥을 철거하기 시작하였는데 고건축물에 대한 놀랄만한 사건은 여기서 발생했다. 남주동 210번지 서모씨 소유의 집에는 ‘은하수’ ‘바다집’ 등 선술집과 복덕방이 있었는데 요란한 간판이 앞을 가려 건축물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 술집 간판과 합판으로 막은 천정을 뜯어내니 실로 어마어마한 고가(古家)가 출현했다. 높이 40cm나 되는 주춧돌 위에 배흘림 기둥이 우뚝 서 있고 굴도리(처마 밑 기둥머리에서 용마루 방향으로 뻗은 건축자재), 합각널, 겹처마가 예사롭지 않은 수키와 팔작집이었다.

 집 뒤 곁으로는 쌀 두 섬이 들어간다는 뒤쥐가 비, 바람을 맞은 채 탈색되어 있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청주시는 건축자재를 시민회관 뒤편에 쌓아두었는데 최근에는 어디론가 또 옮겼다. 비록 청주 읍성 밖에 위치해 있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청주목 또는 충청병영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객사로 보여진다.

 청주읍성 안에는 청주목과 충청병영 이외에 수많은 집무청과 객사가 있었는데 일제때 대부분 헐리거나 이전되고 청주목 동헌인 청녕각(寧閣), 병마절도사, 영문, 수동으로 옮긴 표충사, 제일교회로 이건되었다가 중앙공원에 복원된 망선루 등 일부만 남았다.

 청주목 동헌에는 집사청과 초당(草堂), 주거공간인 내아(內衙)에는 책당(冊堂)이 있었다. 충청병영(현 중앙공원)에는 병마절도사가 집무하던 운주헌(運籌軒)과 비장이 집무하던 비장청(裨將廳), 2층 누각 통군루가 있었고 노비청, 집사청, 당리청, 장청, 아전청, 서당 등 수많은 건물도 있었다.

 일제가 이 많은 건물과 청주 읍성을 헌 것은 근대화라는 미명이었지만 임란당시 청주성 전투에서 조헌 선생, 영규대사 등에 패한데 대한 일종의 앙가품 심리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최근 율랑동 택지개발 예정지구에서 청주목 관아건물이 충청리뷰 취재팀에 의해 발견된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사라져 가는 청주목의 편린을 주어 모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집은 구한말 마지막 청주군수를 지낸 민영은 선생이 1923년, 자신의 집무실처럼 쓰던 관아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건물은 장대석 기단과 주춧돌만 보아도 민가는 아닌 듯 하다. 한때 ‘첨서재’ 현판을 달고 있던 이 건물은 정면 4간, 측면 2간, 팔작집 건물인데 정면을 합판으로 막고 시멘트 기와를 다시 이어 고졸한 옛 맛은 다소 줄어들었으나 보존가치는 충분하다. 원래 자리에 복원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율봉역 역사공원’으로라도 옮겨 청주목의 체취를 전했으면 한다.

/ 언론인,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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