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 205호 충주 고구려비-

1979년 충주 입석마을서 찾은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국내성-평양성-국원성으로 이어진 고구려 남진정책 상징

얼마 전 경매되어 화제가 된 백석 시집 <사슴>이 실시간 검색에 올랐습니다. 100부 중의 1부라 하여 당시 출판기념회의 기사를 찾아보았지요. 출판기념회합이란 자리였는데요. 1936년 1월 29일, 오후 5시 30분, 장소는 태서관. 회비는 1원, 발기인은 안석주, 이원조, 허준, 김기림 이었습니다.(동아일보 1936.1.29.) 어떤 자리었을까 궁금하지만,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사슴> 한권 씩 갖고 있지 않을까요. 과연 누가 소장품이었을까요. 켜켜이 먼지 쌓인 어느 책방에서 “나도 여기 있어”라고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백석의 시를 보면 우리가 잊었던 북방의 체험 공간들이 음식과 더불어 호방하고 웅건한 역사적 상상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만주행을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백석:<북신(北新)>) 시인은 털도 안 뽑은 돼지의 시커먼 맨 모밀국수를 한 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구려를 떠올린 거지요.

▲ 충주고구려비 정면 옆면.
백석은 더욱 경계를 넓혀 흥안령산맥과 아무르강이 있는 만주벌판까지 북방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북방의 중심엔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백석이 가슴에 느낀 ‘뜨거움’속 대륙기질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이라 핏줄 세우며 부른 것도 고구려의 드넓은 기상과 웅혼이 가슴 깊이 올라오기 때문에 목 터져라 소리 질렀을 겁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 뜨겁다는 건 여전히 대지를 달리던 DNA가 남아있기 때문일까요.

충주 입석마을에 무심히 서 있는 비석이 있었지요.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마을 입구 밭머리 길 건너 대장간 벽담모퉁이와 나란히 있었다고 합니다. 비석은 대장간 담벼락에 박혀있어 눈에 띄지 않았을 겁니다. 햇빛과 바람을 막는 흙벽의 풍경으로 있던 거지요.

방죽벌 가는 길, 흙벽돌집 대장간은 있다
퇴락해 가는 흙벽돌 빛 노구(老軀) 개발 바람 불어
이제 호미 낫가락 하나 찾는 사람 없어도
장날에도 화덕의 불 간병 앓는 낯거죽 처럼 꺼져가도
아침이면, 밤새 재속에 고이 묻어둔 씨불을 깨우는 풀무질 따라
코스크의 불꽃은 다시 살아나고, 벌겋게 달구어진
침묵의 쇠를 두들겨 묵묵히 하나씩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모습

<김신용: 방죽벌 시편1-대장간을 지나며>

▲ 최초의 발견당시 사진. ⓒ정영호
마을 초입 세워 선돌 역할하기도

방죽벌 시편에서 우리는 입석마을의 대장간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모퉁이 어딘가에 괴어 있던 빗돌은 대장간과에서 담금질소리와 화로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했을 거구요. 때론 묵묵히 대장장이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을 마주하며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겠지요. 이젠 대장간 화로의 불씨도 볼 수 없지만 벽에 숨어 있던 비석에게 말을 걸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순간이 옵니다.

대홍수 때 수장을 당할 위험도 있었지만, 빗돌은 마을 초입에 다시 세워 때로는 사람들에겐 치성을 드리는 선돌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구쟁이 아이들에겐 놀이기구이기도 했구요. 기나긴 세월 짙은 이끼에 덮여 공들여 깍지 않은 천연의 비 모양 때문에 예사롭지 않은 돌이나 백비인줄만 알았던 거지요.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의 땅 경계를 나누는 기준이었다고도 합니다.

측량 기술이 없던 시절 작지 않은 돌이기 때문에 표지와 방향의 역할은 충분했을 겁니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마을 사람들에겐 자신의 일부였고 일상이었습니다. 비석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녕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

입석마을은 비석이 있기에 불리던 이름입니다. 입석마을로 불리지 않았다면 충주지역은 고대사의 공백지대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타임갭슐과 같은 고구려 비석을 찾게 된 것도 마을 이름 때문입니다. 마을에 놓인 이름 없는 빗돌이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고구려비는 고대사학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습니다. 1500년이 지난 충주골 입석마을에서 부활의 숨을 쉬게 된 비석은 일약 스타에 오르게 됩니다. 그만큼 고구려비의 가치를 말해주는 거지요.

빗돌의 모양은 광태토대왕비의 축소판입니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뤄 마치 비의 머리를 다듬지 않은 두툼한 인상이 고구려의 굳건한 기개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크기는 작지만 고구려의 단단하고 투박한 기질을 그려 볼 수 있는 거지요.

충주고구려비로 이름이 명명되어 장년이 시간이 흘렀지만 비문에 담긴 이야기를 푸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두 번의 대규모 학술회의를 통해 200여자 정도 판독을 하여 인명이나 지명, 비문의 내용과 건립연대와 비의 성격에 대해 많은 견해차가 있기 때문이지요. 충주고구려비의 발견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와 고구려가 국내성-평양성-국원성으로 이어지는 남진정책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충주고구려비 습영사진. ⓒ정영호
장수왕 시절 고구려-신라 회맹비

충주고구려비를 엿보기 위한 작업은 이제 시작인지 모릅니다. 비문을 읽는 다양한 시도에도 고구려의 심상지리는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지금까지의 비문으로 들어가는 흔적을 따라 가다보면 비밀의 주름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몇 가지 공통적인 점을 들어보면 건립 시기는 5세기 중반 장수왕 시절로 봅니다. 이 시점에 삼국의 중심축은 고구려와 신라였기에 고구려는 비문에 형제관계(如兄如弟)로 정한 거구요.

고구려는 신라 마립간을 불러 하늘에 약속하고 의복을 하사했습니다. 의복을 내렸다는 건 고구려가 우월적 존재였다는 걸 확인 할 수 있는 거지요. 고구려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천하의식이 비문에 깔려있습니다. 비의 내용이 고구려국민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고구려 중심의 천하사상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충주고구려비는 양국 간의 국경선에 대한 내용이 마멸된 부분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보이지 않기에 정계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문의 회맹적인 내용의 비중을 들어보면 정략적 회맹비로 보기도 합니다.

남한강변을 따라 충주 고구려비를 만나면 고구려의 함성을 들어야 합니다. 비문에 나오는 수천(守天)이 단지 하늘을 지키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나의 중심과 세계의 질서에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마음은 멀리서가 아닌 산빛으로 와야 합니다.

몸 낮출수록 우람하게 다가서는 저 산빛
떡갈나무 숲 흔들리고 오는 문자왕 그의 호령 중원 고구려비 돌기둥
휘감아 도는데 들리는가, 산울림 우렁 우렁 일렁이는 소리
찾찾찾찾자되찾자…기차소리,하늘의 소리

<윤금초:중원,시간여행>

▲ 사학계 원로들의 판독하는 장면. ⓒ조선일보
▲ 마을 창고에서의 판독하는 장면. ⓒ조선일보
충주에서 듣는 고구려 바람소리

늘 바라보는 중원의 산빛은 스스로 몸을 한없이 낮출수록 우람하게 다가옵니다. 광활한 중원의 푸른 초원이 무겁게 들어온 거지요. 시인은 고구려비를 보며 광개토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기의 문자왕 호통을 듣습니다. 그 울림은 오늘의 꿈으로 되살아 기차소리로 산울림으로 하늘의 소리로 오는 겁니다. 충주 고구려비를 만나면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 바로 울림입니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시인의 바라는 꿈은 시간여행과 함께 울림으로 고구려비 돌기둥과 다짐합니다. 국원성인 충주에서 국내성까지 하나가 되는 기차소리도 칙칙폭폭이 아닌 찾자찾자 염원으로 오늘따라 크게 들리는 건 왜일까요.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 바람은 무엇이냐
장수왕이 세운 중원, 고구려비에 다가갔을 때
한여름 폭염 아래서도 선뜻한 이 기운은 무엇이냐
주몽이 살았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에서부터
광개토대왕에 이어 만주벌판까지
다시 충북 충주까지 영토확장의 깃발을 꽂았던
장수왕이 일으킨 고구려 바람소리이냐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호령소리냐?

<김금용: 고구려의 바람-중원고구려비>

고구려비의 긴 이별과 짧은 만남에서, 시인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과 선뜻함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한 여름 폭염임에도 고구려 바람소리로 여전히 생생하게 들리는 장수왕의 호령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고구려인의 후예라면 한겨레의 살붙이라면 당연히 맞이하고 고구려비가 지르는 함성을 들어야할 겁니다. 바로 충주 고구려비의 존재 이유이며, 고구려 바람맞이 하러 중원에 가는 까닭입니다. 만주 벌판이 봄을 입을 때까지 말입니다.

▲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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