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2창수

어릴 적 친구들이 가방에서 자랑스러이 꺼낸 이국적 학용품으로 아이들의 주눅을 죽일 때면 거의 미국산 아니면 일본산이었다. 당시 한국기술력이나 사회상황은 급속도로 변화되는 과정이었고 새로운 외산 산업품의 첨단성에 모두 찬사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외국산 물건에 열광을 보이던 시절을 지나 오늘날에는 과거 약탈당했던 조선 산업품인 문화재를 다시 찾고자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외국, 특히 일본에 있는 약탈 문화재를 몰래 되 훔쳐(?) 우리나라로 반입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법원과 일본법원에서 소유권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오래전 우리 물건은 꽤 쓸 만 했던 것이다.

친형인 수양대군과 갈등하다 계유정난으로 사사된 안평대군은 역사속 흔적이 대부분 지워졌다. 하지만 1893년 일본 정부가 몽유도원도를 불쑥 자국의 문화재로 등록하면서 다시금 알려졌다. 안평대군이 무계정사에 걸어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던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때 사쓰마의 번주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조선 명화는 1950년 덴리교(天理敎) 본산인 덴리대학도서관이 소장하게 되었으며 한국에 덴리교 포교를 위해 몇 차례 전시를 갖게 되었다. 1903년 덴리교는 서울을 중심으로 포교를 해왔고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과 보조를 맞추어 많은 수의 신도를 거느렸으며 오늘날도 신도를 유지하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유랑하는 꿈을 꾼 뒤 안견에게 꿈의 내용을 이야기 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안평대군 위세를 실감할 만한 많은 문인들의 제발(題跋,그림에 감상의 평을 곁들여 놓는것)을 볼 수 있다. 그 시대 대표적 인물인 김종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 총 20명의 찬문이 있다. 또한 시,서,화가 고르게 격이 높은데 당시 시, 서에 능하지 못하면 학자나 관직에 오르기 어려운 시대이니, 고명한 문인들이 제발은 분명 경지를 보였을 것이다. 여기에 그림은 최고 화원이 그려 놓았으니 조선 최고 명화라 봐도 될 것 같다.

시와 글과 그림의 조화가 함께 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의 완벽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상황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경지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겸손함에서 나온다. 몽유도원도는 분명 훌륭한 그림이지만 격조 높은 글과 시가 없으면 단순한 중국 북송 곽희 풍(風)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의 겸손함은 안평대군의 청을 받아 현실과 이상세계를 그림으로 연결하였고 이상과 현실에 내가 닿을 수 없음을 안타까와하는 정치인들의 염원이 이 그림을 명화로 만든 것이다.

자신이 가진 높고 거대한 아파트와 두둑한 통장잔고 번쩍이는 옷으로 상대방의 부러움을 샀다면 어릴 적 가방에서 외국산 학용품을 꺼내던 수준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위대한 작품은 이상에 대한 다양한 조화를 서로 서로 도우며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 그림이 명화로 칭송받는 것은 그러한 이유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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