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그리스는 유명한 나라다. 그리스신화는 성경만큼이나 유명하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니케 등 12신은 물론이고 헤라클레스와 프로메테우스 같은 신화 속 인간들도 만화의 주인공 이름이나 화장품, 신발 등의 상품명이 될 정도다. 근대올림픽이 처음 열린 곳도 그리스였으며, 그 기원은 고대 올림피아 제전이다.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라톤도 마라톤 평원을 달려와 승전보를 전한 고대 그리스 병사를 기념하기 위한 종목이다.

그리스에 대한 상식은 대개 여기까지다. 지중해와 맞닿아 있고 신들의 후광으로 먹고 사는 관광국가, 누구나 여행하고 싶어 하는 그림엽서 속의 나라,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직접 가 본 사람은 많지 않은 나라이니 말이다.

그런 그리스가 2010년부터 외환위기에 처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외신을 통해 접하는 대규모 실직과 성난 군중의 과격시위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의 나라들은 대부분 살만하려니 생각했는데, 2010년 구제금융 이후 빚쟁이들인 트로이카(유럽중앙은행, 유럽연합, 국제통화기금)로부터 끝없는 내핍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트로이카의 요구대로 복지정책과 공공서비스를 축소하고 공공부문의 인력을 가차 없이 해고한 결과 그리스는 2009년 국내총생산 대비 15%를 웃돌던 재정적자를 2013년 2% 이내로 줄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실업률은 2010년 12.5%에서 지난해 10월 25.8%로 두 배나 뛰었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2010년 32.2%에서 지난해 57.5%까지 치솟았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전한다.

“지난 25일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가 36.3%를 득표하며 압승했다”는 외신보도는 일견 충격적이지만, 충분히 납득이 갈만도 하다. 차기 총리가 될 치프라스 시리자 대표는 “시리자의 승리는 강요받아온 긴축재정과 수모의 끝을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트로이카와 채무이행조건을 다시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 국민들이 사상 최초로 급진좌파정당을 택한 이유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고 희망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그리스의 선택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대한민국은 1997년 시작된 IMF의 구제금융에서 신속히 벗어났지만 이는 ‘신자유주의’라는 질서를 향해 핸들과 브레이크 없는 주행을 시작하게 된 출발선이었을 뿐이다. 그리스만큼은 아니지만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에 대한 담론이 ‘퍼주기’라는 장벽에 가로막히고 공공서비스 민영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10% 경계에 선 청년실업률은 계속 상승세다.

‘그래도 수치상으로는 대한민국이 훨씬 낫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 국민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곳에서 택했던 그 ‘희망’이 우리에게 있느냐고 되묻고 싶다. 그리스 총선에서 시리자는 149석을 확보했다. 기존 집권당인 신민주당은 76석, 황금새벽당과 포타미당은 각각 17석, 공산당 15석, 사회당과 독립당은 각각 13석을 확보했다고 한다. 전체 300석을 7개 정당이 적어도 10석 이상씩 나눠가진 것이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우리도 비례대표를 포함해 300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각각 152석과 127석을 점했고, 통합진보당(정의당과 분당 전)은 13석, 자유선진당 5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리고 지난해 12월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대해 해산결정을 내렸다. 지하혁명조직 RO와 연관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34일이 지난 1월 22일 대법원은 “이석기 피고 등의 내란음모사건에 대해 RO는 실체가 없고 내란선동만 있었을 뿐 내란음모는 없었다”고 선고했다. 헌재는 왜 그렇게 판결을 서둘렀을까?

절망에 빠진 그리스 국민들에겐 희망을 꿈꾸게 하는 정치가 있지만 우리이겐 지역감정과 분단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양당정치’만 있을 뿐이다. 시리자와 그리스 국민들이 써나갈 새로운 그리스신화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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