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소년 내 고장 문화유적 순례 대행진 동행기

  영동에서 단양까지 중원 7 백 리엔 가는 곳마다 역사의 꽃이 피어 한 여름을 무르 익게 한다. 들르는 곳마다 유적이요 머무는 곳마다 문화의 둥지이니 충북의 가리켜 ‘충절의 고장’ ‘역사의 고장’이라 함은 괜한 헛말이 아니다.

  난계 박연 선생의 12 율 관이 복더위를 씻어주는 영동에서부터 세계 인쇄문화의 중흥지인 청주 흥덕사지와 임경업 장군의 충절, 우륵 선생의 예혼을 새긴 충주를 거쳐 단양에 이르는 내 고장 역사 탐방로는 버스 타면 한나절이지만 달리는 말이 얼핏 산을 보듯 대충 지나가기엔 왠지 미련이 남는다.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과 차령산맥 아랫도리를 적시며 양반걸음을 하는 남한강, 금강엔 선비 정신이 녹아 흐르고 산 정수리에서 분지로 부는 바람엔 수 천년의 소리가 묻어 있다. 바람이 전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 땅에 살다 간 선인들의 목소리가 수백 겹으로 싸여 역사의 ‘시나위’를 연주함을 눈치채게 된다.

  청원 두루봉과 수양개의 선사인은 금세 라도 돌도끼를 들고나올 듯 하고, 고구려 장수왕, 백제 성왕, 신라 진흥왕의 말발굽 소리는 아직도 남한강, 금강에 여울져 흐르며 금속활자를 발명한 슬기와 서방정토, 호국불교를 염원한 절 집의 목탁소리는 천년의 충북 혼으로 남아 우리를 일깨운다.

 삼국의 바람이 번갈아 불다 머문 곳에는 어김없이 바람의 지문이 남아 있다. 역사의 나무에 머물다간 바람은 열매를 맺게 하고 삼원색이 하나되듯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으니 그 문화가 다름 아닌 중원문화다.

 충북의 산하는 서로 다른 모순조차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포용심을 가지고 있다. 기마 민족의 창 끝처럼 날카롭지는 않으나 질그릇처럼 투박하여 그 예봉을 무디게 했다. 남한강, 금강처럼 여유 있는 마음 가짐은 북방, 남방의 문화를 이어주고 또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숙성시켰다. 그래서 중원문화의 대표적 특징은 여러 문화를 받아들여 새 문화를 창조하는 ‘용광로의 문화’다.

  ‘그래유’하는 긍정의 철학 속에서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나 일단 어려움이 닥치면 국난 극복의 길에 앞장서니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병자호란 때의 임경업 장군, 3.1 운동 당시의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여섯 분, 그리고 민족의 스승 단재 신채호 선생 등 그 인물을 다 열거하기 어렵다.

 국보 13점, 보물 64점, 사적 17개소, 민속자료 21점, 지방기념물 330점, 천연기념물 23점 속에 충북의 얼을 담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비지정 문화재 속에도 충북의 정서와 문화는 살아 숨쉰다.
 
  옛 것을 모르고 어찌 오늘을 알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은 역사를 사회교과서에 포함하거나 선택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입시위주 교육이 가져온 폐단이요 민족의 정체성을 가볍게 여긴 절름발이 교육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사지 석굴사원을 둘러 보고 있다. 이에 찬란한 역사의 금자탑을 쌓은 선각자의 후예들은 여름방학을 앞두고 전국문화원연합회충북지회(지회장 박영수)와 KBS청주방송총국(총국장 유중근) 주최로 ‘제 3회 충북청소년 내 고장 문화유적 순례 대행진’을 7월 11일, 13~14일 도내 일원에서 벌이고 한반도의 중심인 중앙탑(충주 탑평리7층석탑)에 도내 12개 문화원, 500여 순례자가 집결하였으니 그 거대한 청소년들의 함성에 남한강이 놀라 출렁인다. 참가학생들은 각 시군 문화원 별로 학교장의 추천을 받은 30~40명의 중고 모범생들로 7월 13일 충주에 집결하기 이전, 7월 11일 자체적으로 자기 고장의 문화 유적을 문화재해설사의 안내아래 둘러보았으며 14일에는 서로 다른 고장의 문화유적을 교차하여 탐방했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양산가의 본고장 영동 양산을 찾은 학생들은 신라 김흠운(金歆運)장군이 백제를 치다 전사한, 애절한 사연을 담은 양산가를 읊조리며 양산팔경의 으뜸인 천태산 영국사를 오른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머문 영국사에는 보살의 평안한 미소가 천태산을 감싼다. 1,300년 절 지킴이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233호)는 변함 없이 푸르다. 가지가 땅에 닿아 옆 나무로 이어진 연리지(連理枝) 사랑나무다. 공민왕의 기원처럼 영국사 절 집은 편안하나 절 마당 가운데 3층석탑(보물 제 533호) 옥개석 받침돌 하나가 뒤집혀 있고 초입의 중창 불사가 옛 절의 앞을 가로막아 보는 이의 마음이 약간은 불편하다. 원각국사비의 지붕돌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땅바닥에 내려져 있다. 영국사의 명물 망탑봉 3층석탑은 여유 있게 속세를 굽어본다. 이곳의 석탑은 자연 암석을 기단으로 하여 그 위에 세워진 매우 희귀한 양식의 3층 석탑이다. 그 아래로는 절벽인데 무슨 사연으로 이같은 이형석탑을 세워놓은 것일까. 자연과 절 집이 잘 조화된 절경이다. 아악을 집대성한 난계 박연 선생 추모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현대시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에는 그의 대표작 ‘향수’가 옥천 주민의 가슴에 살아 숨쉰다. 얼룩배기 황소는 간 곳이 없으나 그가 살던 초가는 잘 정돈되어 탐방 객의 시심을 끌어낸다. 정지용 시인이 근대의 표상이라면 옥천 출신으로 조선조의 대표적 인물은 중봉 조헌 선생이다. 조헌 선생이 이끄는 의병과 승병장 영규대사는 임진왜란 때 청주성을 점령한 왜적을 물리치고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니 구국의 충정은 청사를 길이 빛내고 있다. 정지용 생가에서는 시혼을 새기고 중봉 묘소에서는 충절을 본받으니 유적 순례를 통해 내고장의 문(文)과 무(武)를 모두 배운 셈이다. 옥천에는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여러 곳이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안터 고인돌 유적이다. 이 고인돌은 북방계열의 탁자식이고 선돌과 짝을 이루는 이른바 ‘디스릿드’ 양식이다. 무덤방에서는 얼굴모양의 예술품이 나왔으며 선돌의 배(腹)부분에 새긴 지름 90cm의 원은 임신한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고인돌에 묻힌 여인이 아이를 낳다 죽은 것이 아니가 학계는 추측하고 있다. 옥천군은 앞으로 대청댐 수몰지역에서 발굴된 선사유적을 망라하여 ‘선사 테마공원’을 계획하고 있다. 학습의 동기는 흥미유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유적을 잘 정돈하면 체험학습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장맛비를 뿌려댄다. 백제 성왕의 눈물인가. 보은 어암리오정산을 감싼 삼년삼성(사적 제 235호) 성벽에도 빗물이 흘러내린다. 금강 상류를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였던 신라와 백제다. 백제 성왕은 변방을 시찰하다 옥천 구천(狗川:개내)에서 신라 복병에 사로잡혀 삼년산성으로 압송된후 장수 고간도도에 의해 최후를 마치니 성벽에 한이 서릴 만도 하다. 속리산 법주사는 미륵의 도장인 동시, 문화재의 보고(寶庫)다. 국보 제 5호인 쌍사자 석등을 비롯하여 국보 제 55호인 팔상전, 국보 제 64호인 석연지 등 보물이 널려 있다. 우리나라 유일한 목탑(木塔)인 팔상전은 여러 번의 해체 복원 과정에서도 정연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머리에 이고 있는 쌍사자 석등은 여전히 경학(입 벌린 사자)과 참선(입 다문 사자)으로 사바를 밝힌다. 입 벌린 사자는 암사자이고(힘이 들어서) 입 다문 사자는 숫 사자라는 얘기는 잘못 전해진 속설이다. 극락의 연못 석연지에는 하늘이 머물고 있다. 단단한 화강암을 이리저리 주름 잡으며 여러 겹의 연꽃을 새긴 솜씨는 깊은 불심 없이는 불가능하리라. 미륵의 도장 법주사 절 마당에는 최근 개금 불사를 마친 금동미륵불상이 속세를 굽어본다. 먼 훗날 나타나 중생의 고통을 구제해준다는 미륵불이다. 우리의 선조는 돌만 잘 다룬 게 아니다. 쇠를 다루는 솜씨도 일품이어서 청주용두사지철당간(국보 제 41호)에 준풍(峻豊)이라는 고려의 독자적 연호와 청주가 뿌리깊은 교육도시임을 밝히는 학원경(學院卿), 학원낭중(學院郎中) 등 교육 책임자의 직함도 돋움 글씨로 새겨 넣었다. 그 기술은 더욱 발전되어 급기야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탄생시켰으니 세계 인쇄문화의 중흥지로 주목받는 청주 흥덕사지가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직지는 아직도 프랑스로 외출중이다. 그러나 직지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데 이어 직지/유네스코상 까지 제정되었으니 내 고장, 아니 한국의 으뜸 자랑으로도 손색이 없다. 상령산 계곡을 감싼 상당산성(사적 제 212호)에선 삼국의 바람이 불어온다. 백제의 상당(上黨), 고구려의 낭비(娘臂), 통일신라의 서원(西原)이 이 산성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 후삼국 시대에는 상당산성의 궁예와 까치 내 변의 정북동 토성에 진을 친 견훤이 대적하였고 왕건의 군사는 용암동 입구 무농정에서 집결하여 궁예가 주둔한 상당산성을 쳤으니 산성의 영원한 주인은 없다. 청원문화원이 관내 학생들을 인솔하고 첫 번째로 찾은 유적은 단재 신채호 사당. 청원군 귀래리에 자리잡은 선생의 묘소와 사당을 참배한 학생들은 기념관을 둘러보고 단재의 큰 뜻을 새겼다. 종래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확립한 신채호 선생은 영원한 민족의 횃불이요 스승이다.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필가로 활동을 하다 여순 감옥에서 숨을 거둔 선생의 일생은 구국의 일념으로 일관되었다. 북이면 금암리에 있는 의암 손병희 선생 생가와 기념관은 잘 정비되어 있다. 돌담에 초가 삼간, 마당의 잔디밭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였으나 선생의 체취는 유허지 일대에 널려있다. 3.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으뜸자리에 있던 손병희.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어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자존의 목소리를 드높인 선생의 사자후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이곳에 게양된 태극기가 모두 몇 기(基)인지 알아요?” 문화재 해설사가 퀴즈를 내자 한 학생이 ‘33기’ 라고 정확하게 맞춘다. 민족대표 33인을 뜻함이다. 학생들은 팔봉산 자락에 있는 안심사에서 한 숨을 돌리고 안심사영산회괘불탱(국보 제297호)과 맞배집 대웅전을 관람하였다. 대청호 조성으로 수몰의 위기를 면한 청원군의 고건축, 고인돌, 돌비를 모은 문의 문화재 단지는 청남대와 더불어 관광인파가 끊이질 않는다. 여기에 비해 맞은편에 위치한 양성산성엔 인파가 뜸하다. 고려 태조8년(925) 유금필 장군은 연산(문의)를 공격하였는데 이 때 후백제의 길환 장군이 양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답사의 피곤함을 달래고자 문화재 해설사가 재미있는 얘기를 곁들인다. “여러분, ‘쪼다’의 유래를 알아요? ‘조다’는 고구려 장수왕의 아들인데 장수왕이 90을 넘게 살아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부왕보다 먼저 세상을 뜬 비운의 왕자입니다. ‘조다’의 발음이 강해지면서 ‘쪼다’가 된 것인데 오늘날에는 제몫을 찾아먹지 못하는 어리벙벙한 사람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죠” 문화재 해설사의 재치 있는 역사 얘기에 학생들은 “그렇게 깊은 뜻이...”하면서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굴린다. 작년 초미니 군으로 출범한 증평군은 증평문화원 채비를 차리고 올해 처음 답사에 참여했다. 처녀 출전(?)이라지만 문화답사에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우선 관내 유적을 뒤돌아보면서 증평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1차로 독립운동가 연병호 선생 생가를 탐방하였다. 선생은 이병철, 조용주 등과 비밀항일운동 단체인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였다. 선열의 높은 뜻이 있었기에 오늘의 증평이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광덕산 기슭에 있는 광덕사 석불은 신라말 고려초의 작품으로 높이가 무려 3.98m에 달하는 거대한 석불이다. 아직도 자비는 돌부처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데 절 집은 오 간데 없다. 염실 마을 뒤편에 있는 남하리 사지에도 3층석탑과 삼존불을 포함한 반가사유상, 여래입상이 마애불로 남아 있으나 이곳 역시 절 집을 잃은 지 오래다.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 같아요. 탑 등이 훼손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증평여중 2학년 강혜린 양의 따끔한 지적이 비수처럼 꽂힌다. 버스는 잣고개를 숨차게 오르내리며 진천 농다리와 연곡리 석비를 찾는다. 세금천을 가로지르는 농다리는 1천년의 세월을 몸으로 견디어 왔다. 자연석을 지네 발 모양으로 쌓아 웬만한 물난리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축조의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연곡리 석비엔 비문이 없다. 귀부와 이수(용머리 장식을 갖춘 돌비의 지붕돌)가 제법 화려한데 웬일인지 돌비에는 글자 한자가 없다. 아마도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불가의 가르침을 새긴 것일까.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이 비를 흔히 백비(白碑)라 부른다. 태령산 아래 상계리에는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의 생가가 있고 말을 타고 달리던 치마대 등 유적이 널려 있다. 도당산 아래 길상사 흥무전에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김유신 장군 영정이 아직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 송강 정철묘소를 참배하니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숱한 명작이 시공을 초월하여 들리는 듯 하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의 지조와 문학혼을 알기라도 하는 듯 소나무는 푸른색을 더한다. 신수리 백제도요지는 3세기경 미호천의 진흙으로 질그릇을 빚으며 살아온 토기집단의 흔적이다. 물 좋고 흙과 볕이 좋아 농사걱정을 덜게되니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산자수명한 괴산 들녘에는 약오른 고추가 지천이다. 상추쌈에다 풋고추를 된장에 듬뿍 찍어 먹는 맛도 여름철 별미다. 동부리에 있는 벽초 홍명희 생가는 소설 임꺽정의 산실이다. 벽초가 월북하는 통에 반세기나 흉가로 방치되어 급기야 매각의 벼랑에서 흔들리던 ㄷ자형 한옥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였다. 이곳 사랑채는 3.1운동당시 태극기를 만들며 괴산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한일합방 후 소나무에 목을 매어 순국한 벽초의 아버지 금산군수 홍범식의 생가이기도 하다.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곱고 미운 눈길이 교차하였으니 이 모두가 일그러진 근대사의 아픔이다. 괴산의 절 집으로서는 각연사를 으뜸으로 꼽게 된다. 천년고찰이 주는 아늑함과 칠보산 계곡을 타고 내리는 맑은 물은 복더위를 어느새 잊게 한다. 더구나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좌상을 보면 마음이 더 평안해 진다. 비로자나불은 광명의 부처다. 검지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주먹 쥔 손 모양은 복싱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포용한다는 뜻이다. 산바람이 속인의 땀을 씻어주는 칠보산 자락에는 통일대사 탑비와 부도탑 등 불적이 널려 있다. 우암 송시열의 화양동 서원으로 잘 알려진 화양동에는 여름철 피서객들의 발길이 빼곡하다. 음성은 설성(雪城)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눈이 오면 가섭산, 수정산성 등 동네를 감싼 메 부리와 산 능선이 마치 ‘눈의 성’처럼 보인다. 망이산 봉수는 청주 것대산~진천 소흘산을 거쳐온 봉수와 문경새재를 넘어온 봉수를 합쳐 경기로도 넘겼다. 오늘날로 치면 통신 기지국이다. 음성으로 가는 길목엔 한금령이 버티고 있다. 즉 이 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증평 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금강으로 흘러들고 충주 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금강문화권과 한강문화권의 교차지점이다. 그래서인지 금강문화권의 벅수나 돌장승도 음성 위쪽에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모전석탑이란 석재로 벽돌 탑의 모양을 모방한 탑을 말한다. 석재를 벽돌처럼 다듬어 탑부재로 쓰거나 외양상 벽돌탑의 흉내를 내는데 충북에서는 음성의 5층모전석탑과 제천 장락동7층모전석탑이 있다. 벽돌탑(전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고리역할을 한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에서 학생들은 불교미술의 한 갈래를 배운다. 마애불이란 자연 암벽위에 불상을 돋을 새김(양각) 또는 오목 새김(음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명종 15년(1560)에 창건된 음성향교와 양촌 권근 3대묘소 및 신도비에서는 충북의 선비정신을 음미해 본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우리의 귀에 익숙한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랫말이다. 1960년대까지 충북을 소재로 한 유일한 대중가요였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한국판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이 연이어져 있는 고개를 넘으면 제천이다. 을미사변후 의병이 봉기할 때 제천출신 의병장 유인석은 경상도의 신돌석과 더불어 당시의 대표적 의병장이다. 남한강을 무대로 인접도를 넘나들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우국지사다. 제천에는 월악 영봉이 있고 그 봉우리와 지맥을 둘러싼 덕주 산성이 있다. 통일신라 때의 석성이나 거의 무너지고 조선조에 다시 쌓은 남문, 동문, 북문이 남아 있다.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羅城)구조로 둘레 2km에 달한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맏딸 덕주공주가 이곳으로 피난을 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와 더불어 삼국초기에 쌓은 유서깊은 저수지다. 오늘날 호서(湖西), 호남(湖南)을 구분할 때 그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이른 봄,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내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빙어(또는 공어)가 먹거리 명물이었는데 요즘은 각지로 퍼졌다. 단양은 선사유적의 보고(寶庫)다. 수양개 유적을 비롯하여 금굴, 구낭굴, 바위그늘 등 선사유적이 즐비하다. 남한강이라는 큰 가람과 석회석 덕분에 유물이 잘 보존되었다. 후기구석기(1만7천년)유적으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수양개 유적에는 조만간 야외박물관이 들어서게 된다. 높은 재 죽령을 머리에 이고 있기 때문일까. 단양 땅은 신라와 고구려간에 세력다툼이 치열하던 곳이다. 온달산성(사적 제 264호)과 적성산성(사적 제 265호), 그리고 적성비(국보 제 198호)는 바로 그런 흔적들이다. 온달장군은 아차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문제의 아차산은 일반적으로 서울의 아차성(워커 힐 뒤편)으로 알려져 왔으나 서울이 아닌 단양 아단성으로 보는 학자도 많다. 고구려 때 단양의 지명은 을아단이었다. 아단성과 아차성을 혼동한게 아닌지...아무튼 단양에는 온달장군과 연관된 설화나 지명이 유난히 많다. 적성비는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의 세력을 밀어 올리고 개척하면서 지방민을 선무한 것인데 여기에는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 이름도 등장한다. 발견하기 이전에는 등산객들이 흙을 터는 돌로 이용되었다 하니 하마터면 빛을 보지 못했을 보물이다. ▲ 충주 탑평리 7층 석탑(중앙탑)으로 도내 12개 문화원 500여 청소년 순례단이 집결하였다.
 관내 유적 탐방을 마친 순례단은 중원문화의 꼭지점인 충주 중앙탑으로 집결하였다. 남한강물도 순례단을 환영하는 듯 물결을 솟구친다. 문화원마다 깃발이 중앙탑 앞에 펄럭인다. ‘역사 문화 살아 숨쉬는 단양’ ‘미래의 땅 살기 좋은 괴산’ ‘한국 항공 우주원 유치 인삼의 고장 증평’ ‘중원문화 계승하여 중원문화 꽃피우자’
 
 4백여명의 학생과 문화재해설사를 포함한 각 시군 문화원 행사진행 관계자, 그리고 특별취재에 나선 KBS 청주방송총국 정화진 취재팀을 등을 합치면 5백여명에 이른다.

 행여 학생들이 실수나 하지 않을까 지도교사도 노심초사. 강전섭 대성중교사는 “청주의 범생이(모범생)를 대표한 만큼 청주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미리 쐐기를 박는다.

 “사실 오늘날 영양실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문화 실조입니다” 역사 과목을 들러리로 배우는 현실에 대한 강 교사의 일침은 송곳 같다. 지구상에 역사과목을 선택과목이나 통합과목으로 배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다.

 학생들의 문화유적 순례 대행진도 따지고 보면 교실 안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현장학습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탑의 층수는 층급 받침이 있는 지붕돌(옥개석)만 세는 것이예요, 밑 부분은 탑을 세우기 위한 기단이고 윗부분 상륜부는 일부가 없어졌지요. 상륜부 노반(露盤)이 이중으로 된 것은 전국에서 이 탑밖에 없습니다. 탑평리7층석탑(중앙탑)은 지기(地氣)를 누루거나 돋우기 위한 비보탑(裨補塔)인데 소금배가 들락거릴 때는 이정표의 구실도 했답니다”

 수필가로 문화재해설을 맡은 충주의 박선례 씨는 청산유수다. 일정기간 연수를 받은 후 현장에 배치되어 문화재해설을 맡는데 연륜이 쌓이다 보니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고구려 때 국원성(國原城)으로 삼국의 숱한 문화재를 보듬고 있는 충주는 중원문화의 핵심이다.

 국보 제 205호인 중원고구려비를 관람할 계획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보호각에 대한 보수공사로 직접 보지 못하고 유물관에 있는 복제품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충주에는 왠지 고구려의 체취가 강하다. 한반도에 유일한 중원고구려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암리 고분에서는 고구려 석실분의 흔적이 남아 있고 봉황리 마애불에서도 고구려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을 둘러보며 필자(임병무)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12대의 전세버스는 빗 길을 뚫고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기슭에 위치한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국보 제 197호)으로 향했다. 산길이 좁아 버스운행이 어려웠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일부러 와보기 힘든 문화재다.

 고려말 이름을 높인 보각국사는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입적하였고 다비를 한 후 고승의 사리를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곳으로 쉽게 말하면 스님의 무덤이다. 흔히 부도탑이라 부르는데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는 구별해야 한다.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은 여덟모서리의 지대석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잘 갖추었다. 배흘림 형식을 갖춘 몸돌 여덟 면마다 구름, 용, 사자상 등 안상을 부조형식으로 새겨 넣었다. 부도로서는 보기 드문 걸작인데 더욱 특이한 것은 전면의 석등과 후면의 탑비가 세트로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메모장엔 역사의 숨결이 빼곡하다. 순례단의 귀착점은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리사지(사적 제 317호). 온달장군이 숨차게 달려온 하늘재 아래 석굴사원인 절 터엔 석불입상이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정북향을 한 석굴사원은 거의 파괴되고 석불입상과 5층석탑, 3층석탑, 그리고 주인 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북좌대와 온달장군의 공기돌이라 전해지는 둥그런 바위가 남아 있다.

 석굴의 감실(석굴사원 주위로 들어간 부분)에는 불,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을 법도 한데 몽고 전란으로 시커멓게 그을린 흔적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망국의 한을 안고 하늘 재를 넘어온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이곳에 머무르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애절한 사연이 뭇 탐방객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수안보 사조 리조트에서 여장을 풀은 순례단은 신형식 상명대교수의 주제강연 ‘중원문화를 바로 알자’를 경청하고 그들만의 시간인 친교의 마당에서 마음껏 ‘끼’를 발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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