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에서 단양까지 중원 7 백 리엔 가는 곳마다 역사의 꽃이 피어 한 여름을 무르 익게 한다. 들르는 곳마다 유적이요 머무는 곳마다 문화의 둥지이니 충북의 가리켜 ‘충절의 고장’ ‘역사의 고장’이라 함은 괜한 헛말이 아니다.
난계 박연 선생의 12 율 관이 복더위를 씻어주는 영동에서부터 세계 인쇄문화의 중흥지인 청주 흥덕사지와 임경업 장군의 충절, 우륵 선생의 예혼을 새긴 충주를 거쳐 단양에 이르는 내 고장 역사 탐방로는 버스 타면 한나절이지만 달리는 말이 얼핏 산을 보듯 대충 지나가기엔 왠지 미련이 남는다.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과 차령산맥 아랫도리를 적시며 양반걸음을 하는 남한강, 금강엔 선비 정신이 녹아 흐르고 산 정수리에서 분지로 부는 바람엔 수 천년의 소리가 묻어 있다. 바람이 전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 땅에 살다 간 선인들의 목소리가 수백 겹으로 싸여 역사의 ‘시나위’를 연주함을 눈치채게 된다.
청원 두루봉과 수양개의 선사인은 금세 라도 돌도끼를 들고나올 듯 하고, 고구려 장수왕, 백제 성왕, 신라 진흥왕의 말발굽 소리는 아직도 남한강, 금강에 여울져 흐르며 금속활자를 발명한 슬기와 서방정토, 호국불교를 염원한 절 집의 목탁소리는 천년의 충북 혼으로 남아 우리를 일깨운다.
삼국의 바람이 번갈아 불다 머문 곳에는 어김없이 바람의 지문이 남아 있다. 역사의 나무에 머물다간 바람은 열매를 맺게 하고 삼원색이 하나되듯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으니 그 문화가 다름 아닌 중원문화다.
충북의 산하는 서로 다른 모순조차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포용심을 가지고 있다. 기마 민족의 창 끝처럼 날카롭지는 않으나 질그릇처럼 투박하여 그 예봉을 무디게 했다. 남한강, 금강처럼 여유 있는 마음 가짐은 북방, 남방의 문화를 이어주고 또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숙성시켰다. 그래서 중원문화의 대표적 특징은 여러 문화를 받아들여 새 문화를 창조하는 ‘용광로의 문화’다.
‘그래유’하는 긍정의 철학 속에서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나 일단 어려움이 닥치면 국난 극복의 길에 앞장서니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병자호란 때의 임경업 장군, 3.1 운동 당시의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여섯 분, 그리고 민족의 스승 단재 신채호 선생 등 그 인물을 다 열거하기 어렵다.
국보 13점, 보물 64점, 사적 17개소, 민속자료 21점, 지방기념물 330점, 천연기념물 23점 속에 충북의 얼을 담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비지정 문화재 속에도 충북의 정서와 문화는 살아 숨쉰다.
옛 것을 모르고 어찌 오늘을 알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은 역사를 사회교과서에 포함하거나 선택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입시위주 교육이 가져온 폐단이요 민족의 정체성을 가볍게 여긴 절름발이 교육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관내 유적 탐방을 마친 순례단은 중원문화의 꼭지점인 충주 중앙탑으로 집결하였다. 남한강물도 순례단을 환영하는 듯 물결을 솟구친다. 문화원마다 깃발이 중앙탑 앞에 펄럭인다. ‘역사 문화 살아 숨쉬는 단양’ ‘미래의 땅 살기 좋은 괴산’ ‘한국 항공 우주원 유치 인삼의 고장 증평’ ‘중원문화 계승하여 중원문화 꽃피우자’
4백여명의 학생과 문화재해설사를 포함한 각 시군 문화원 행사진행 관계자, 그리고 특별취재에 나선 KBS 청주방송총국 정화진 취재팀을 등을 합치면 5백여명에 이른다.
행여 학생들이 실수나 하지 않을까 지도교사도 노심초사. 강전섭 대성중교사는 “청주의 범생이(모범생)를 대표한 만큼 청주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미리 쐐기를 박는다.
“사실 오늘날 영양실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문화 실조입니다” 역사 과목을 들러리로 배우는 현실에 대한 강 교사의 일침은 송곳 같다. 지구상에 역사과목을 선택과목이나 통합과목으로 배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다.
학생들의 문화유적 순례 대행진도 따지고 보면 교실 안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현장학습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탑의 층수는 층급 받침이 있는 지붕돌(옥개석)만 세는 것이예요, 밑 부분은 탑을 세우기 위한 기단이고 윗부분 상륜부는 일부가 없어졌지요. 상륜부 노반(露盤)이 이중으로 된 것은 전국에서 이 탑밖에 없습니다. 탑평리7층석탑(중앙탑)은 지기(地氣)를 누루거나 돋우기 위한 비보탑(裨補塔)인데 소금배가 들락거릴 때는 이정표의 구실도 했답니다”
수필가로 문화재해설을 맡은 충주의 박선례 씨는 청산유수다. 일정기간 연수를 받은 후 현장에 배치되어 문화재해설을 맡는데 연륜이 쌓이다 보니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고구려 때 국원성(國原城)으로 삼국의 숱한 문화재를 보듬고 있는 충주는 중원문화의 핵심이다.
국보 제 205호인 중원고구려비를 관람할 계획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보호각에 대한 보수공사로 직접 보지 못하고 유물관에 있는 복제품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충주에는 왠지 고구려의 체취가 강하다. 한반도에 유일한 중원고구려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암리 고분에서는 고구려 석실분의 흔적이 남아 있고 봉황리 마애불에서도 고구려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을 둘러보며 필자(임병무)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12대의 전세버스는 빗 길을 뚫고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기슭에 위치한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국보 제 197호)으로 향했다. 산길이 좁아 버스운행이 어려웠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일부러 와보기 힘든 문화재다.
고려말 이름을 높인 보각국사는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입적하였고 다비를 한 후 고승의 사리를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곳으로 쉽게 말하면 스님의 무덤이다. 흔히 부도탑이라 부르는데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는 구별해야 한다.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은 여덟모서리의 지대석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잘 갖추었다. 배흘림 형식을 갖춘 몸돌 여덟 면마다 구름, 용, 사자상 등 안상을 부조형식으로 새겨 넣었다. 부도로서는 보기 드문 걸작인데 더욱 특이한 것은 전면의 석등과 후면의 탑비가 세트로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메모장엔 역사의 숨결이 빼곡하다. 순례단의 귀착점은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리사지(사적 제 317호). 온달장군이 숨차게 달려온 하늘재 아래 석굴사원인 절 터엔 석불입상이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정북향을 한 석굴사원은 거의 파괴되고 석불입상과 5층석탑, 3층석탑, 그리고 주인 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북좌대와 온달장군의 공기돌이라 전해지는 둥그런 바위가 남아 있다.
석굴의 감실(석굴사원 주위로 들어간 부분)에는 불,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을 법도 한데 몽고 전란으로 시커멓게 그을린 흔적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망국의 한을 안고 하늘 재를 넘어온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이곳에 머무르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애절한 사연이 뭇 탐방객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