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8~9세기 신라 건립 추정, 뱃길 교역 중심지에 높이 13m 위용 과시
1917년 충주시 수선공사 설계도 ‘중앙탑’ 표현, 일반명칭으로 사용

충북의 국보 코드 읽기
김덕근 ‘충북작가’ 편집장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충주라 하면 외지인들은 충주비료공장 견학의 추억이나 충주사과, 신립장군의 탄금대나 수안보온천을 되비치기도 합니다. 충주호가 생기면서 이 고장은 물의도시로 불리거나 남한강과 함께 수상스포츠의 메카로 불리기도하지요. 충주에 가서 “탑평리 칠층석탑이 어디예요?”라고 하면 이곳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중앙탑이 어디예요?”라는 물음에 “아, 중앙탑요”라고 합니다. 충주사람들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 조선고적도보 중앙탑(1916년) 상륜부의 복발이 위태롭다.

유려한 남한강변에 천년 이상을 자리한 석탑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곳 사람들은 ‘중앙탑’이라 불렸습니다. 중앙탑은 충주사람들에게 실존의 중심이자, 세계와 관계를 맺는 장소의 원형과도 같은 터전입니다.

충주의 옛 지명인 ‘국원성’ ‘국원소경’ ‘중원경’에서도 ‘중앙’, ‘중심’을 찾아낼 수 있지요. 국토의 심장부라는 장소성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현재의 지명인 충주(忠州)도 중심(中+心) 고을(州)이라는 점에서, ‘중앙’이라는 충주골 사람들의 자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지요. 충주사람들은 충주를 나라의 한복판이라 믿고 있는 거지요.

탑들, 탑평리 유래는 중앙탑

충주의 목행대교와 달천교나 유주막다리를 보면 중앙탑모양이 다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충주시민의 ‘중앙탑’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계조정경기가 열린 탑평리의 결승타워도 중앙탑을 현대적으로 형상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충주시청 3층 회의실도 중앙탑회의실로 명명할 정도입니다. 충주사람들에게 ‘중앙탑’은 오래전부터 함께해온 가족이상의 그 무엇일겁니다. 중앙탑은 단순히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닌 충주시민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삶과 충주를 이루는 랜드마크가 아니었을까요.

그렇지만 문헌에 등장하는 ‘중앙탑’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중앙탑은 1917년으로 추정되는 ‘충청북도 충주군 중앙탑 수선 공사 설계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탑의 이름은 지명과 층수로 정해지는 것이 관례이지요. 당시 ‘중앙탑’이란 이름을 어떻게 알고 사용했을까요. 아마 탑평리 사람들은 지금처럼 키가 큰 탑의 이름을 ‘중앙탑’이라고 말해줬을 겁니다. 충주사람들이 중앙탑이라는 이름짓기에서 탑에 대한 소유와 영유의 가치를 드러내려했던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우리역사에서 충주의 남한강은 백제, 고구려, 신라순으로 움직이는 국경이었지요. 역사적으로 충주를 장악하는 나라가 천하를 다스렸을 정도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모두 알고 있던 거지요. 충주는 수운이 편리하여 남한강 천리물길에 뱃길은 물류교역의 중심지어서 오늘의 버스정류장이라고 할 수 있는 13곳의 큰나루가 있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조령과 이화령을 통해 영남을 잇는 통로이자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난리가 나면 전쟁터가 되곤 했지요.

중앙탑이 있어 탑들이라 불린 탑평리는 남한강이 수시로 범람하던 지역입니다. 무려 높이가 13m나 되는 높은 탑을 하필 강변에 세웠을까요. 중앙탑에 대한 건탑년대와 건립이유에 대한 문헌기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충주에 대한 지리지의 고적편에도 드러나지 않는 걸 보면 중앙탑은 남한강변에서 갈대의 노래를 듣거나 오가는 황포돛대를 바라보곤 했을 겁니다. 시인묵객들의 문집에도 인근의 탄금대나 가흥창이나 장미산성 등이 배경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중앙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요.

 

 

 

 

 

 

▲ 󰡔일본풍속지리대계󰡕(1930년) 중앙탑 부근

삼국 각축지대 신라 중심사상 구현

중앙탑의 건립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봅니다. 이 고장 사람들에겐 중앙탑에 대한 오래전부터 믿고 있는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 원성왕 대에 사람들을 시켜 나라의 최남단과 최북단에서 동시에 걸어서 출발해 만난 곳이 탑평리였기에, 이곳을 신라의 중앙이라하여 탑을 세워 중앙임을 표시했다는 거지요.

또한 충주에 왕이 탄생할 기운이 있어 이를 누르려고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신라 중심사상을 알리기 위한다거나 민심이반을 시켜 나라의 안정을 위해 만들었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중앙탑의 수수께끼에 대해 뾰족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중앙탑 창건의 비밀은 중앙탑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천년 시간의 스토리텔링에서 오늘도 중앙탑은 다시 새로운 갈무리가 되어 탑의 존재와 이유에 대해 자문자답하게 합니다.

중앙탑 전설은 단순히 묵힌 이야기가 아니라 충주사람들에게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중원문화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전설은 충주사람들에게 역사적 문헌과 달리 생생한 울림으로 전해져 지역의 정체성이자 기억되는 역사로 남게 됩니다. 실제 ‘안반내’라는 마을이 있는데, 한반내(韓半來)는 ‘한국의 반’ 즉 국토의 한가운데라는 거지요. 이 고장 사람들에게 ‘중앙의식’은 적어도 충주가 지역으로서의 변방이 아닌 중심의 가운데이기를 바라는 기대와 보상에서 오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진에 모습을 드러낸 중앙탑은 1916년에 발행한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나옵니다. 아마 세키노 교수의 일행이 1912년 11월 20일에 촬영한 그 사진일 겁니다. 당시 조수로 활동했던 야츠이에게 보인 중앙탑은 모습은 “한강의 왼쪽 기슭 약간의 개활지에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빼어난 신라탑이며, 그 위대함은 익산의 미륵사지석탑에 버금간다”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고적도보>에 나온 중앙탑은 떡시루를 엎어놓은 복발 위의 앙화가 떨어질 것만 같은 부끄러운 얼굴로 보입니다. 기단의 무너진 서측과 북측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한 남측에서 찍었는데, 탑신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앙탑이 일제에 의해 엉터리 복원 되기 전의 마지막모습인거지요.

 

 

 

 

 

 

▲ 중앙탑 기단 실측도(1917년)

천년 수해에도 건재, 토단은 보수

30년대에 발간된 <일본지리 풍속대계>에 나온 사진은 중앙탑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중요한 그림입니다. 이 때 중앙탑을 보면 지금처럼 높은 토단에 있지 않아 외롭지 않게 있습니다. 논밭이 있는 작은 언덕에 초가집 몇 채, 마을로 가는 길은 늘 우리가 자주 봤던 그림이거든요. 밭을 가는 농부와 마실가는 아낙이 모습이 정겨운 풍경에서 탑은 권위는 볼 수 없습니다. 돌탑 뒤로는 ‘탑들나루터’가 있어서 강건너 원포리를 건너다니거나 뗏목이나 황포돛대가 정박하기도 하였을 겁니다. 참나무가 있는 주막은 남한강의 이정표이자 정거장이기도 했고 뱃군의 쉼터였지요.

1936년 신문지상에도 ‘충북의 명승지 중앙탑’에 탐승객들이 답지하고 있고 “넓은 광야의 조연모화(朝煙暮霞)를 헤치고 우뚝 솟아있는 중앙탑을 찾아오는 자동차소리가 연락부절하리라”하여 주덕읍부터의 도로확장의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벌써 이때부터 중앙탑 진입로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지요. 남산초등학교에 다니던 소년 유종호의 눈에는 해방 전후의 중앙탑이 “보리밭 한가운데 서 있는 머쓱한 돌탑”이라 하였는데, 참 정겹게 보입니다. ‘목계가 고향인 신경림 시인도 “탑그늘에 앉아 넋을 잃고 강물을 한참 바라보다가 도시락을 먹고 또 걸어갔다”라고 하여 강을 따라 걷는 길에 함께하는 친구로 중앙탑을 맞이합니다.

남한강변에 물난리가 잦은 이유 때문에 중앙탑은 처음부터 구릉의 정상부에 세웠을 겁니다. 석공들은 강기슭의 특성을 읽어 정성을 기울여 견고하게 축조했을 테고요.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과 조형미와 사람들의 간절함으로 돌이 세워진 거지요.

근래 1972년 대홍수 때도 기단까지 물이 찰 정도로 남한강 물흐름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1000년 이상의 세월에 몇 번의 수해가 지나갔을까요. 다행히 중앙탑은 수차례의 재해에도 끄떡없던 거지요. 신라석공의 숨결과 기운이 탑평리 터를 누르고 있어서일까요.

중앙탑이 더욱 껑충 키가 커 보이는 것은 높다란 토단 때문입니다. 중앙탑을 해체하고 다시세우는 과정에서 수해를 염려해 토단을 높였던 거지요. 그럼에도 탑이 강 언덕과 어울려 있어 지금의 모습처럼 외롭지 않았던 거지요. 60년대의 사진에도 돌탑은 마을과 어울려 함께 있음이 확인되니까요. 그렇지만 빈번한 물난리에 탑 주변의 겉은 깎여 나갔을 겁니다. 여러 차례 주변 정지작업을 하면서 단을 쌓을수록 탑의 축대는 우뚝해 보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 1972년 대홍수시의 중앙탑 기단 밑이 보인다 옷을 널어 말리고 있다.

‘돌의 숨소리’ 노래한 시인들

지난 여름 남한강에 세계조정대회로 열려 세계 80개국 2000여명의 선수들이 중앙탑을 다녀갔습니다. 노를 저어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충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돌탑은 충주를 너머 세계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거지요. 세계를 향한 꿈과 도전이 이루어지는 곳, 자연과 하나 되는 지구촌 물축제에 충주사람들은 다시 한번 ‘중앙’이란 깃발을 초록별 가족들에게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드디어 중앙탑은 세계의 우주수로 새로 태어나는 셈이지요. 일찍이 신경림 시인은 이 축제를 예견한 것인지 중앙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반도 한복판을 가르며 흐르는 물길 굽어보며
기름진 들판을 어루만지며
산과 동무해 나 여기 서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바람을 한데 모아
산짐승 들짐승의 웃음과 울음을 한데 모아
비와 눈과 바람의 기운까지 끌어 모아
천둥과 번개의 힘까지 끌어 모아

높고 넓은 하늘에 꿈으로 열매 맺기 위하여
땅에 널리 퍼져 노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서로 얼싸안고 뛰노는 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신경림 「중앙탑을 노래함」부분

중앙탑 존재의 이유는 강산의 푸른 기운과 땅의 숨결과 아름다운 꿈을 모아 이 땅에 깊이심기 위해라는 거지요. 우리는 여기서 석탑의 장소적 무게중심이 생명과 삶의 중심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기운과 힘이 돌탑으로 모아지기 때문에, 한데 합쳐서 열매가 맺고 노래가 되고 춤이 되는 천지개벽이 중원골에서 이루지길 바라는 거지요.

때로는 ‘한반도 배꼽의 석탑이 원융회통의 할’을 하고 ‘한 점 욕심마저 걷어내고 진리의 탑발원할 때’(선묵 자혜 「중앙탑에서」) 사바세계(裟婆世界)에서 정토세계를 인도하는 돌탑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오늘날 중앙탑의 염원은 무엇일까요? 강건너 종포나루로 마실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봄날 장미산성에 나들이 가는 것일까요? 염원이 깊으면 하늘도 길을 열겠지요.

충주사람들은 오늘도 각자 지니고 있는 바람들을 가지고 탑돌이를 합니다. 탑평리 중앙탑은 늘 서있지만 이따금 승천하여 하늘의 별이 되기도 합니다. 천년의 기다림은 일심(一心)으로 천상의 아우라를 보여주는데, 이 또한 돌탑의 공덕 때문이지요.

무더운 밤마다
먼 말발굽소리 안반내 들에 잦고
밤 깊어 속 물살 눈 뜨면
강물 속의 이무기와 잉어 떼가
신라의 선남선녀와 어우러져
탑 끝에서 별까지 닿는
향기로운 꽃길을 여는지…
아! 서기로운 구름이
피어 있어

양채영 「칠층석탑」부분

이것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는 아닙니다. ‘먼 말발굽소리’가 탑평리에 잦아진다는 것은 침략의 광기가 아닌 희망의 기운이 온다는 거지요. 때에 따라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인지라 상서로움이 예감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것도 무더운 밤에 말입니다.

밤은 깊고 물의 뻗는 힘이 크면 클수록 사실 눈을 뜨기가 쉽지는 않지요 그러나 눈 밝은 사람은 상승의 기운을 열 수 있는 거지요. 물속의 탑 끝에서 별까지 이어지는 꽃길의 중심에 칠층석탑이 있습니다. ‘서해로 귀 기울이는 짙푸른 물결’이 있기에 안반내의 돌탑은 하늘을 치솟아 왕관 같은 앙화(仰花)를 피우고 있습니다.

돌이 숨을 쉰다
돌의 숨소리가 보인다
돌은 육신이다
돌 위에 쌓아올린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조영서 「遠視」부분

 

 

 

 

 

 

▲ 중앙탑 전경.

근시가 아닌 원시를 통해 가까이 다가오기에, 우리는 의심 없이 돌탑의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 지나치게 가까이 투시를 하게 되면 숨 쉬고 있는 육신의 돌탑도 바위 조각물 이상은 아닌 거지요. 욕심 없이 돌에게 마음을 줄 때 탑은 흰구름 한 점 손짓하는 하늘가에 연금술처럼 무량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앙탑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보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돌들이 숨을 쉬고 있다는 믿음 때문인 겁니다.

강변의 탑은 세월의 상흔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영토나 진영의 해제에도 묵묵히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탑평리 중앙탑은 충주성 몽고전투는 물론 임진왜란 당시 남한강의 핏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무탈히 새천년을 맞이한 탑입니다. 천년의 나이에 비해 얼핏 중앙탑은 강건해 보입니다.

중앙탑이 얼치기 해체복원 된지도 한 백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기술로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꾸며진 중앙탑공원에서 신음하는 탑의 눈물이 보이는 건 왜일까요. 공원에서 자꾸 중앙탑이 숨바꼭질 하고 있다는 모멸감이 들기도 하고요. 탑파의 몸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제 일본에 의해 성형된 탑신을 온전하게 맞춰야할 때가 온 거지요. 중앙탑에 덧칠해진 시멘트도 지워야할 것이고 비와 바람을 견뎌낸 살과 뼈에 온전한 탑의 DNA를 넣어야 하겠지요. 잃어버린 꿈들이 하늘에 닿을 때까지 충주사람들은 중앙탑을 놓을 수 없을 겁니다. 파리엔 에펠탑이 피사엔 피사의 사탑이 있듯이 충주에는 중앙탑이 있습니다.

이들 탑처럼 키가 크거나 사계절 내내 탐방객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풍경과 기억을 남겨주고 탐욕을 쪼아 가슴에 묻게 해주는 중앙탑과 살고 있는 충주사람이 부럽습니다. 오늘따라 탄금호에 비추인 중앙탑이 성성해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충주사람들이 중앙탑을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탑평리 들판의 노을이 강물에 젖을 때 중앙탑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한 가운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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