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크와 그의 계승자들의 작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23
윤정용 평론가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출연: 엘 헤디 벤 살렘, 브리기테 미라, 구스티 크라이슬, 엘마 칼로바
많은 영화 감독들이 더글라스 서크를 인용했고 그의 특이한 영화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토드 헤인즈가 두드러진다. 그들은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을 모티브로 해서 작품을 제작했다. 연극 연출가였던 파스빈더는 서크의 회고전을 보고 그의 영화적 솜씨에 고양되어 서크의 양식적인 언어와 자신의 실험연극에서의 경험을 결합시켰다. 그 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3)는 파스빈더가 서크의 멜로드라마를 매우 직접적으로 참고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을 리메이크한 것은 아니다. 비록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사이의 관계라는 같은 서사 형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나이든 여성은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과부가 아니라 나이 든 노동계급 청소부 에미 크루와스키(브리짓 미라블 분)다. 그녀의 연인일 수 있는 남자는 비순응자 정원사가 아니라 그의 고상한 아랍식 이름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알리’(엘 헤디 벤 살렘 분)라고 불리는 흑인 모로코 노동자다.

동네 모로코식 바에 술을 마시러 간 에미는 다른 이민 노동자 집단과 함께 살아야한다고 역설하는 알리를 만난다. 친절한 과부인 에미는 알리를 초대해 그녀와 머물 수 있게 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처음에는 에미에게 알리는 잘 생긴 힘 좋은 젊은 남자 친구로서 의심할 여지없이 자랑스러운 존재했지만 그녀와 일하는 동료, 이웃, 거래하는 상점과 그녀가 하찮은 청소 일을 하도록 재정적으로 도와주던 친척들까지도 그와 그녀를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인종의 문제 주목한 영화

에미와 알리 사이에는 긴장감이 증폭된다. 서크의 영화에서는 계급과 신분이 둘의 관계에 걸림돌이었다면 파스빈더의 영화에서는 ‘인종’ 문제가 대두된다. 그는 공공연한 사회 비판 요소들을 서크적인 아이러니로 악화시킨다. 예를 들면, 에미는 알리와의 결혼을 축하하며 오스테리아 이탈리아나라는 히틀러가 좋아하던 식당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녀는 흑인 이주 노동자와의 결혼 축하연 장소로 나치의 지도자가 즐겨 찾던 식당을 선택하는 아이러닉한 행동을 보인다. 웨이터가 혐오스런 침묵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다. 영화는 비록 행복한 결말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처럼 남자 주인공이 병드는 것으로 끝난다. 알리는 천공성 위궤양 진단을 받는다.

이는 존 버거의 『제7의 인간』에서 묘파되듯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이주노동자의 위험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완벽하게 회복하기 위한 회복기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병이 재발될 것임을 알려준다. 이런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에미는 그들이 거울에 포착된 상태의 알리와 앉은 채 그의 절망적인 상황에 울음을 터뜨린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는 론이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그와 캐리는 앞으로 함께 할 것이라는 희망이 암시된다. 그러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는 제목 그대로 희망은 존재하지 않고 ‘불안’만이 그들 앞에 놓여 있다.


동성애 문제 전경화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은 시대착오적인 영화 양식으로 매도된 멜로드라마의 범주를 재고하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멜로드라마가 ‘여전히 동시대의 관객을 위해 집을 수 있는 서사 경험 중 가장 품위가 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명확하게 정당한 사회 비판 장치로 기능한다.

<파 프롬 헤븐>은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처럼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을 매우 분명하게 참고하고 있지만,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을 리메이크했다기보다는 서사의 윤곽만을 취하고 서크의 다른 영화, 즉 <슬픔은 그대 가슴에>, <바람에 쓴 편지>로부터 주제를 택해 원본을 모방하기보다는 오히려 반영한다. 무엇보다도 <파 프롬 헤븐>의 가장 큰 성과는 1950년대 멜로드라마에서는 사회 규범 뿐만 아니라 제작 규정 때문에 다룰 수 없었던 주제, 이를테면 동성애 문제를 전경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 프롬 헤븐>은 서크의 영화들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구조적인 양식적 기법들이 부족한 반면에 조심스럽게 약호화된 미장센은 여전히 사용되며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해 만들어진 부재로 가득 찬 환경을 창조한다.

예컨대, 캐시는 발레를 공연하는 딸을 방문한다. 캐시가 딸에게 친구들이 어디 있냐고 묻자 카메라는 어두운 강당에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캐시와 그녀의 딸을 나머지 사람들이 바라보는 장면을 포착한다.

즉 캐시와 그녀의 딸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었음을 무언으로 극적 재현한다. 이 장면은 헤인즈가 서크와 파스빈더의 사회 비판적 양식을 차용했음을 상기시킨다.

파스빈더와 헤인즈의 작업은 멜로드라마가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 밖에서 계속 존재했으며 또한 기본적으로 더글라스 서크에게 빚진 양식 기법들이 영화 비평 범주 안에서 멜로드라마 주변의 논쟁에 의해서 알려진 영화 감독들의 등장에 의해서 전유되고 발전되어 왔음을 예거한다.

또한 멜로드라마의 범주가 단지 ‘가족’에만 국한되지 않고 계급, 인종, 성차 등 다양한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크와 그를 계승, 발전시킨 파스빈더, 헤인즈의 멜로드라마는 멜로드라마가 단순히 음악이 가미된, 혹은 음악이 주인공인 빤한 스토리의 영화가 아닌 사회비판의 기능을 갖는 영화 양식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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