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동범상 수상한 김은순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성아우구스티노는 ‘정의란 최소한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의식주는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다. 그런데 우리사회에는 그 최소한 것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대해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레 세상의 낮은 곳으로 시선이 향할 수 밖에 없다”

제12회 동범상 시민운동가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김은순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이 한 말이다. 그는 수상 소감에 대해 “기쁜 것 보다 마음이 무겁다. 이제 참여한지 겨우 6년 밖에 안됐다. 이 상은 오래 활동을 한 사람이 받은 걸로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2009년 청주 교구에서 하는 교리 신학원 공부를 하게 됐다. 공부 이후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 내 삶이 바뀌었을 뿐이다. 내가 이 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수줍어했다.

사진/육성준 기자


그는 자신을 시민운동 활동가라기보다 신학 공부를 통해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는 신앙인으로 규정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가 발생했을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들 곁에서 같이 미사를 보며 많이 울었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을 눈으로 보았다. 공권력이란 거대한 힘에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힘없는 철거민들을 보았다. 이때 용산 철거민들이 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목소리였다. 김 국장은 당시에 대해 “이 목소리를 외면하고 살수는 없다. 연대해야 한다”고 느꼈다. 용산 참사 때 그가 깨달은 연대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 곁에 가만히 있어 주는 것,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세례명 ‘프란치스카’

그는 1995년 4월 15일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성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제일 좋아했던 김 국장은 곽동철 신부에게 ‘프란치스카’란 세례명을 직접 부탁했다. 그래서 그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카’다.

2009년 용산 참사의 깨달음과 청주교구에서 천주교 사회교리 공부를 마친 뒤 신학 교리 공부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2010년 서울대교구 사회교리학교 1년 과정을 마쳤다. 그는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고 했다. 특히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시선은 낮은 곳을 향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삶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옮겼다고 했다.

4대강 사업으로 피폐해진 두물머리 주민들의 농성장, 일본군의 성노예로 고초를 겪은 위안부 할머니들, 용산의 철거민들,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 추모와 진상규명의 현장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및 진상규명을 위한 충북범도민대책위 집행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매주 촛불집회와 천만인서명운동을 전개했다. 팽목항을 방문하고 광화문 단식농성장에서 국민대책회의본부에서 주관하는 추모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교회 안에서는 추모미사와 시국미사를 각 2회 개최하고 사제 수도자 평신도 선언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현재 천주교청주교육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직책을 맡고 있다. 김 국장 은‘정의’와 ‘평화’에 대해 “평화라는 것은 정의의 열매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평화를 이야기 해선 안된다. 평화는 입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소외된 곳으로 연대해야

김 국장은 “사회문제만 꺼내도 이념적으로 느낀다. 신자들은 사회문제 꺼내면 안되는 줄 안다. 활동 때문에 교회 안에서 험한 말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제2차바티칸공의회 평신도 교령 7항은 “하느님의 뜻은 신도들이 힘을 합해 사회를 개선하는 것”이라며 적극적인 사회참여야 말로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온통 신앙적 삶과 연결 지은 그가 의외의 사실을 말했다. 자신이 신 내림을 받은 무속인의 자손이라 는 것. 그는 “사춘기가 됐을 때는 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까지도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과 인연이 아니었다고 했다. 김 국장은 “어릴 적 친구를 보며 언젠가는 꼭 가리라 마음 먹었던 교회를 결혼 후 성인이 되어서 접하게 됐고 나이 40을 넘어 성경적인 삶을 채우기 위해 교리를 공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청소년기 내 좌우명은 ‘끊임없는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였다”며 “어른이 된 지금은 ‘주인의식으로 살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로 좌우명을 바꿨다”고 했다.

그는 “매일 물질적인 것도 그렇고 영성적인 가난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다”며 “내게 있는 물질적인 가난은 고난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2011년 24살 된 딸이 백혈병에 걸린 남자 한테 골수이식을 해준 일을 나중에 알았을 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딸 생일날 안부전화를 했다. 그런데 딸이 골수이식하고 지금 무균실에 있다고 해 정말 많이 울었다. 학원도 못 보내고 혼자 힘들게 키웠는데… 나눔을 아는 딸을 보며 정말 기뻤다. 사랑을 나눌 수 있고 실천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딸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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