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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넓은 들은 서쪽 끝으로 펼쳐지고 있다. 동쪽으로는 우암산, 상당산, 선도산이 봄바람을 차단하는 통에 청주의 봄은 서쪽의 부모산이 먼저 안다. 청주의 지세를 보면 동쪽은 산악지대로 막혀있고 서쪽은 구릉지대와 평야를 형성하며 기름진 땅을 제공하고 있다. 북진을 하는 무심천은 까치내에서 미호천과 몸을 섞으며 바다를 연모하듯 서남쪽으로 고개를 튼다. 서원경 시대부터는 당산, 우암산을 진산으로 삼으며 도시가 남북으로 발달하였다. 남북으로 긴축을 형성한 모습이 마치 배(舟) 모양 같다하여 주성(舟城)이란 별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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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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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의 돌다리 남석교엔 수많은 사람들의 족적이 묻어 있다. 서원경의 관리에서부터 민초에 이르기까지, 무심천을 가로지른 남석교를 통해 양 쪽을 왕래하였다. 고려시대 공민왕도 남석교를 통하여 안동으로 파천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무인시대의 주인공 경대승 또한 이 다리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선시대, 남석교 건너 분평동 일대에는 정진원(情盡院)이라는 관리들의 숙박소가 있었다. 분평동 택지개발로 정진원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명종 때의 성리학자 성제원(成悌元:1506~1559)과 청주목 관기 춘절(春節)의 고고한 로맨스는 청사(靑史)를 타고 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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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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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반시설이 열악하던 1960~70년대는 이른바 극장의 전성시대였다. 텔레비전 보급이 미흡했던 당시, 극장은 문화예술의 전당이요 은밀한 데이트 장소였다. 007 시리즈를 비롯하여 마카로니 웨스턴 시리즈와 중국 무술영화가 뒤를 이었던 극장은 문화에 대한 욕구를 푸는 유일한 장소였다. 원래 극장과 영화관은 그 차별성이 있으나 초창기 우리나라 극장은 영화도 상영하고 일정한 무대도 갖춰 악극, 여성국극, 그리고 ‘쇼(Show)’라고 일컫는 악극단도 수용하는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영화관이라는 말보다는 무슨 극장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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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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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달이 되면 할머니는 시루떡을 정성껏 마련하여 마을 앞 개울로 나가 용왕굿을 하셨다. “ 용왕 님, 사해천왕 용왕 님, 슬하자손 상남자손 구만리 앞날 부디 굽어살피시고 입견만리 좌견천리 밝은 눈으로 돌봐 주세요…” 할머니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빨래터에 촛불을 밝혔다. 대낮도 아닌 저녁 어스름께 할머니가 고사 떡 시루를 머리에 이고 개울로 향하면 소지 종이 등을 챙겨들고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동산에 떠오른 보름달이 개울로 빠져들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제방에 납작 엎드려 고사지내는 것을 구경하다가 고사를 끝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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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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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글자로는 ‘금연’이란 두 글자다. 이 두 자를 볼 때는 무슨 송충이나 독사를 보는 것같이 소름이 끼친다. 이 두자가 멋없이 걸리기를 좋아하는 버스나 극장은 그래서 도무지 가까이 하고 싶지가 않다” 애연가로 소문난 오상순(吳相淳)은 애연소서(愛煙小敍)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하면 호까지 숫제 공초(空超)라고 불리었을까. 그는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서너 개피의 담배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전한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담배는 광해군 말년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였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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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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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들은 이내 주인의 추격에 뒷덜미를 잡혔다. 참외 서리에 나선 동네 악동들은 저마다 한 아름씩 노획물(?)을 안고 더딘 걸음으로 도망가다 그만 붙잡힌 것이다. 한 두개 씩만 따 먹었으면 무사했을 텐데 말이다. 잊혀지지 않는 어린 날의 초상(肖像)이다. 포커 게임은 버림의 게임이다. 새 카드를 또 받자면 아무리 좋은 패라도 한 장 버려야 한다. 달도 차면 기울 듯 잔도 차면 넘치기 마련이다. 욕심을 버릴 때 복(福)과 덕(德)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찾게 된다.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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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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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은 18세기 예단(藝壇)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진다. 시, 서, 화 3절(三絶)로 일세를 풍미했던 예술가다. 여기에다 화평(畵評:미술평론)까지 하였으니 범인으로서는 넘지 못할 큰 산이었다. 당대에 이름을 떨친 김홍도, 신위 등도 그의 제자다. 그는 사대부 화가로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켰다. 개화의 물결이 일렁일 즈음 과감히 서양화의 기법도 수용하였으니 실험정신 또한 높이 사 줄만 하다. 벼슬길에는 비교적 늦게 올랐다. 64세때 기구과, 66세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영릉참봉, 사포별제,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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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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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은 태초부터 관광 특구이자 거주 특구다. 한반도 인류의 첫 족적이 단양에 찍혔기 때문이다. 산 좋고 물 맑아 사람 살기에 제격이었다. 도담삼봉을 건너서 아래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야산지대에 거대한 동굴이 입을 열고 있다. 이곳이 70만 년 전, 인류가 살았던 ‘단양 금굴’이다. 지난 1983년~1986년에 연세대 손보기 교수가 발굴 조사한 이 유적에서는 주먹도끼, 찌르개 등 전기구석기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 동굴은 전기 구석기에서부터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켜켜이 묻혀 있는 표준 유적(Standard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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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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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구석기 유적에서도 늑대, 이리, 들개 등 개과(犬科)에 속하는 짐승 뼈는 여러 군데서 찾아졌다. 50만 년 전 유적인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개과에 속하는 짐승 뼈가 나온바 있으며 제천 점말용굴, 단양 구낭굴에서도 그런 흔적이 발견됐다. 개과 짐승의 출현은 인류의 출현과 궤를 함께 한다. 어쩌면 인류보다 먼저 지구상에 나타난 짐승이 개과 동물인지도 모른다. 공룡이 번성하던 쥬라기 시대에 개과 짐승은 그냥 야생 상태로 존재하였다. 호랑이나 하이에나처럼 숲 속에서 먹잇감을 포획하며 자연 상태로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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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6.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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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의 행간에서 특정인물을 평가할 때 흑백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사람이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31대 공민왕과 정치적 코드가 맞는 신돈, 두 사람은 전 후반기로 나누어 볼 때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같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위 당시 공민왕은 영특한 왕이었다. 개혁정책과 더불어 배원정책을 표방하며 고려국의 주권회복을 위해 힘써 왔다. 1352년에는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을 금지시켰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였으며 고려의 모든 제도를 문종대로 돌려놓았다. 또한 내정간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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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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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최고의 가사문학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의 작품에서 찾아진다.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다. 그러나 쌍벽을 이룬 가사문학의 틈새에도 높게 솟은 봉우리가 여럿 있다. 영조 48년(1772)에 영월부사로 부임하여 단양팔경을 예찬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의 단산별곡(丹山別曲)이 그러한 예 중의 하나다. “장회촌 돌아드니 채운봉 반기난 듯/ 구름 속 뿌린 비난 그 아니 신녀(神女)런가/ 석로(石路) 빗긴 곳에 견여를 갈아메니/ 무협원성(巫峽猿聲)은 양안(兩岸)에 들리 난 듯/ 조도(鳥道)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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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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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극장나들이를 한 적이 있다. 시골에서는 영화관을 대개 극장이라고 하였다. 영화뿐만 아니라 악극단 공연, 연극공연, 쇼 공연도 함께 열리던 다목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장에는 남녀석이 분리되어 있었고 뒷자리 임검석에서는 그것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하는 수없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앉았고 어머니는 건너편 여자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가족이 극장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만 이산가족이 되고 만 것이다. 문화예술의 향기를 공유해야할 가족이 왜 따로 따로 앉아 감상해야 하는가를 할아버지에게 물었다가 ‘남녀칠세부동석도 모르냐’며 알밤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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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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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의 활자는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을까. 고활자 주조법은 대략 2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고운 모래(뻘흙)를 이용한 주물사주조법이고 또 다른 방법은 밀랍을 이용한 밀랍주조법이다. 직지활자가 어떤 방식으로 주조되었는가는 아직 결론나지 않았으나 밀랍주조법이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주물사주조법은 북 모양의 틀에서 생산해내기 때문에 고주법(鼓鑄法)이라고도 한다. 고려, 조선시대 화폐(동전) 등을 만들 때 사용하던 방식이다. 이 방식은 풀무질로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넣어 굳히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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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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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손 모양(수인:手印)은 천태만상이다. 속리산 법주사의 금동미륵불은 여원인(與願印),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손 모양을 취하고 있다. 모든 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무서움을 막아준다는 뜻이다. 한쪽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마귀를 굴복시킨다는 의미다. 이처럼 대다수 부처님은 손바닥을 펴고 있는데 유독 주먹을 쥔 부처가 있다. 다름 아닌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한쪽 손으로 다른 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다. 부처님이 왜 주먹을 쥐었을까. 복싱이나 K-1 리그에 나가자고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세상의 온갖 번뇌를 포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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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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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석기 시대, 충북지역과 중국 요령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적은 단동(丹東)에 있는 전양(前陽)동굴이다. 단동시 동구현(東溝縣) 채석장에서 발견된 전양 동굴 유적은 1만8천년전의 후기구석기 유적으로 단양 수양개(1만7천년)와 매우 닮아 있다. 이곳에서는 슬기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의 두개골이 출토되었고 석기는 후기구석기 문화의 대표적 양상인 잔석기(세석기)문화상을 보이고 있다. 석기는 많지는 않지만 석회석, 차돌 등을 돌감(재료)으로 한 떼기 수법은 수양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전양 동굴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곧 한반도에 이른다. 즉 전양 동굴의 인류가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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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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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전시한 ‘밭을 가는 남자’와 ‘추수하는 여자’ 그림이 새겨진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가 관람객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청동기는 지난 1970년, 전국의 고물상을 떠돌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수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 출토되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방패형 동기, 청동거울 등과의 공반 관계 및 제작수법 등을 따져봤을 때 아마도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듯싶다. 구입경로를 보면 대전의 고철상, 서울의 골동품상을 전전하였으니 대전에서 나왔다는 소문도 출토지를 뒷받침해주는 방증자료다. 유물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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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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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지등산, 인등산 지맥이 박달재를 껴안고 연이어 내려오다 돌연 남한강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라는 마을을 남겨두기 위해서일까. 강 건너로 계족산이 보이고 허리 안개가 빠떼루 자세로 산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조동리는 나훈아의 노래처럼 ‘강촌에 살고 싶네’가 절로 나오는 강변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이 세인의 주목을 끈 것은 내륙 중부권의 최대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라는 점이다. 바다가나 큰 강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신석기 문화가 이렇게 깊은 내륙에서 꽃 피웠다는 사실은 누구도 몰랐었다.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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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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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개국과 충북사람의 인연은 꽤나 깊다. 경문왕의 서자인 궁예는 어린시절. 청주에서 숨어 살았다는 일화가 이 고장에서 전해진다. 어릴 때, 정변으로 한 쪽 눈을 잃은 궁예, 그는 새 왕조의 꿈을 안고 청주 지역 구라산성(구녀산성)근처에서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엘 보면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상당산성 절 집에서 거주하던 승장(僧將) 영휴(靈休)의 기록이다. 그는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고 작강(鵲江:까치내)변에 견훤과 대치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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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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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배달겨레의 고향을 으레 단군할아버지의 신시(神市)로부터 찾는다. 비, 구름, 바람을 몰고 와 쑥과 마늘을 먹고 인고의 세월을 거친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한반도 그 결 고운 비단 강산에 고조선을 열고 겨레의 씨앗을 퍼트렸다. 신화적 접근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의 모습도 현재의 모습과 거의 같다. 반만년 역사, 그것은 한반도 신석기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때 살던 사람들은 대개 프랑스식으로 분류하자면 ‘크로마뇽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접근에 있어서는 단군할아버지가 강림하기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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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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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 천황봉에서 머물던 가을이 법주사를 내리 덮친다. 단풍으로 시작되는 절 집의 가을은 날마다 혼돈과 고요가 번갈아 온다. 행락인파가 지나고 난 자리에 범종이 울면 저녁 어스름이 찾아들고 산방엔 이내 고요 바람이 대웅보전 주위를 맴돌며 서방정토에 있는 무아지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붉고 노란색으로 채색된 절 집의 단풍은 세속의 나뭇잎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맑은 바람, 붉은 태양으로 멱 감고 화엄의 바다로 흩어진 청정한 모습은 티끌에 절은 회색도시의 단풍과 차이가 있다. 산 정수리를 타고 내려온 서늘한 바람에 푸르던 이파리 제 색깔을 잃고 형형색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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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고문
2005.10.20 00:00